[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②왕희지와 난정서

탄력있고 예리한 서수필에 담은 '멋진 풍류'

王義之 蘭亭序(353년) 臨摹本(八柱第三本), 북경고궁박물원 소장 (desk@jjan.kr)

자고로 한·중·일을 막론하고 글씨하면 떠오르는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왕희지(王羲之)이다. 그가 출현한 이후 지금까지도 서가든 서가가 아니든 글씨를 논할 때면 언필칭 왕희지를 운운한다. 단지 천하명적을 남겼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왕희지는 오랜 역사를 통해 수없이 재평가되면서 신화를 축적하였고, 이로써 서성(書聖)의 지위에 오르며 신비로운 인물이 되었다. 한 사람이 역사를 만들고 역사가 다시 영웅을 만든 것이다.

 

동진(東晉)시대 목제(穆帝)의 치세기인 영화(永和) 9년, 서기로는 353년,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삼월 삼짓날, 중국 회계군 산음(山陰)에 위치한 난정(蘭亭)에서 천하의 풍류객들이 모여 사악한 기운을 씻어내는 경건한 의식을 행한 뒤,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잔치를 베풀었다. 쌍세창(桑世昌)의 「난정고(蘭亭考)」에 의하면 당시 행사에는 회계내사였던 우장군(右將軍) 왕희지, 그리고 그의 아들과 인척들, 사안(謝安)과 사만(謝萬), 손작(孫綽) 등 42인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동진의 권문세가인 왕(王)·사(謝)·유(庾)씨를 비롯하여 그 지역의 현사들이 참여한 유상곡수연에는 왕희지 일가만 10명이 참가하였고, 그 중에는 희지의 장자 현지(玄之)와 5자 휘지(徽之), 7자 헌지(獻之)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상곡수연은 맑은 냇물을 끌어들여 포석정처럼 구불구불한 물길을 만들고, 여기에 잔을 띄워 잔질하며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시작(詩作)하는 것이다. 계곡의 아름다운 풍광이 시상을 일으키고 술이 시흥을 돋구자 하나 둘씩 시를 읊어내기 시작하였다.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였던 왕희지는 4언시와 5언시를 각각 1편씩 지었다. 이렇게 두 수를 지은 사람은 11인, 한 수를 지은 사람은 15인이었으며, 시를 짓지 못하여 벌주 석 잔을 마신 사람은 16인이나 되었다. 대안도(戴安道)를 찾아간 일로 유명한 희지의 5자 휘지도 두 수를 지었으나, 역사상에서 희지와 더불어 이왕(二王)으로 불리는 7자 헌지는 끝내 시를 짓지 못하였다.

 

잔치가 끝날 무렵, 시를 한 곳에 모아 시집을 엮자는 말에 모임의 중심이었던 왕희지가 흥을 타고 즉석에서 시집 서문을 지어 쓴다. 세로 폭이 한 자를 조금 넘긴 질긴 견사지(繭絲紙)가 앞에 놓이고 쥐수염으로 만든 예리하고 탄력 있는 서수필(鼠鬚筆)이 놓여졌다. 잠시 흥기된 마음을 가라앉혀 평심정기(平心靜氣)를 이룬 후, 이윽고 필단을 곶추세워 가슴속 깊은 언저리의 흥회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누구나 그러하듯 붓을 처음 내리 찍을 때는 신중하되 과감하여야 한다. 글씨의 기상과 크기 그리고 절주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永和九年歲在癸丑暮春之初…'.

 

무슨 일이 언제 어디서 있었는지를 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므로 문장은 이렇게 시작하였다. 붓에 흥을 싣는 데는 행서가 가장 적격이다. 첫 행이 13자로 끝나고 다음 행으로 넘어가면서 행간이 결정되고 전체적인 장법이 예견된다. 행간이 지루하지 않으면서 대소강약의 절주를 느끼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희지가 앞서 읊었던 두 편의 시처럼 늦은 봄날의 아름다움과 한없이 즐거운 시회를 술회하는 것으로 문장은 이어진다. 동진시대 353년 늦봄에 열린 난정에서의 멋진 풍류는 이렇게 고스란히 역사에 남겨지게 되었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