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희지가 유상곡수연에서 즉흥으로 휘호한 '난정서'는 그의 문장력은 물론 필력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명작이다. 이러한 희대의 명작은 유전하며 많은 일화를 남긴다. 정관지치(貞觀之治)로 유명한 당태종 이세민은 왕희지의 글씨를 좋아하여 보이는 대로 수집하였으나 이 '난정서'만은 구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희지의 7세손 지영(智永)이 '난정서'를 비장하고 있다는 것은 알아차리고 심복인 소익(蕭翼)을 시켜 '난정서'를 빼돌려 마침내 손에 넣었다. 그 기쁨이 어떠했을까. 모든 명물은 수집가 앞으로 모인다는 소동파의 말처럼 당태종은 그것을 입수하고 더 없는 행복감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남의 물건을 빼돌린 죄의식도 차마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행복감과 죄의식이 당태종의 마음을 이끌었는지 모르지만, 당태종은 손수 '왕희지전'을 지었고, 이것이 현재 '당서(唐書)'에 전한다. 이는 역사에서 보기 드문 예이다.
불행스럽게도 '난정서'는 당태종의 유언에 따라 소릉(昭陵)에 부장되었고, 이로써 천하명적은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할까. 그것을 입수한 당태종이 당시의 명서가들을 불러 진적을 똑같이 모사하여 대신들에게 하사했는데 그것들이 지금 세상에 전하여 그 전모를 볼 수 있다. 왕희지의 '난정서'가 이러한 비운의 역사를 예견했는지 봄날의 아름다운 서경을 술회하는 것으로 시작한 문장은 점차 인생무상을 자탄하는 처연한 분위기로 흘러간다. 한없는 즐거움 뒤에 밀려오는 불안감이 고조되어 있다. 목숨이 길거나 짧거나 자연의 조화에 따라 죽음은 기약되어 있는데, 오늘 같은 즐거움에 앙연자족하며 늙음이 장차 이르는 줄을 알지 못했던 자신. 이제야 장자가 사생(死生)이 하나이며 팽상이 똑같다고 했던 말들이 모두 허탄하고 망령된 것임을 알겠다고 회고하며 비탄한다. 마지막 문장에서 '훗날 이것을 보는 자는 또한 나의 글에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라고 예언까지 하고 있으니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처럼 명문장에 명필로 쓰여진 이 '난정서'는 명시문을 모은 소통(蕭統)의 '문선(文選)'에 선택되지 못했다. 확실하지 않지만, '天朗氣淸'이라는 구절이 마치 가을을 의미하는 듯해서 당시 늦봄의 서경을 표현하는 데 적절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왕희지가 이처럼 인생을 비탄조로 바라본 데에는 이유가 있다. 가장 절친했던 벗 은호(殷浩)의 실각과 죽음, 며칠 차이로 재롱둥이 두 손녀의 죽음, 며느리의 죽음, 형과 형수의 죽음, 친족의 죽음 등등 가혹할 정도로 처연한 슬픔에 잠긴 왕희지는 봄날의 경치가 아무리 기꺼워도 즐거워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병약한 자신의 처지도 한 몫을 하였을 것이다.
'난정서'보다 3년 뒤(356)에 쓰여진 '상란첩(喪亂帖)'은 이러한 왕희지의 애수를 증명하는 또 다른 명작이다. '상란(喪亂)이 극심해져 조상의 묘가 다시 재난을 만나 황폐화되었으나 당장 수리하려해도 아직은 달려갈 수가 없다.'는 애통한 심정이 절절이 드러나며, 유려한 비애미를 넘어 숭고미로 치닫고 있다. 명작은 슬픔을 동반한다는 말이 이런 것일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닥치는 불행한 일들로 인하여 한없는 슬픔과 인생무상을 체감한 왕희지는 이렇게 숨김없이 자신의 삶을 표현하였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