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부터 송현동 이화익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앞두고 만난 사진작가 민병헌(54)은 "앞으로도 재료가 허락하는 한 흑백사진을 찍을 것"이라며 흑백사진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드러냈다.
안개에 쌓인 듯한 화면 속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흑백의 풍경 사진으로 유명한 그는 이번 전시에서 '나무'(tree) 연작과 '폭포'(waterfall) 연작 등 20여 점을 선보인다. 이전 작업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들이지만 흑백의 대조가 더 뚜렷해져 대상이 훨씬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10년 전쯤에는 작품의 크기를 작게 해서 밀도 있게 보여줬는데 점점 작품의 크기가 커졌죠. 톤(색조)도 40대에는 더 흐리고 (대상이) 더 안보였는데 조금 더 나이가 드니 좀 더 솔직한 톤으로, 본질적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디지털 사진이 시대의 대세가 된 지금에도 필름 사진을 고집하는 몇 안 되는 사진가 중 한 명이다. 필름을 이용하는 것은 물론, 인화에서 현상까지 전체 작업 과정을 조수 없이 직접 자신이 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제 사진은 누구에게 맡겨서 나올 수 있는 사진이 아니에요. 제 손으로 마지막까지 작업하지 않으면 그 기분을 느낄 수가 없어요. 제 작업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작은 한 부분일 뿐입니다. (사진찍은) 그 뒤로도 인화와 현상 등 할 일이 너무나 많거든요."
디지털 시대 필름 작업에는 난관이 많다. 당장 인화지나 필름 현상액 등 필름 작업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하기조차 어려워졌다.
"처음에는 무척 걱정을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남들이 다 손을 놓는 상황에서 좋은 점도 있는 것 같아요. 전 세계 곳곳에는 고집있는 사람들이 미미하지만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중소 규모로 인화지를 만드는 회사도 새로 생겨나기도 하죠. 아날로그 젤라틴 실버프린트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디지털의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돈을 줄 테니 길이 4m 정도 되는 벽을 채울 수 있는 대형 사진을 만들어달라는 주문도 있었다. 사진 인화지의 크기 때문에 가로 1m20cm 정도가 한계인 아날로그 작업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도 디지털로 뽑은 제 대형 사진을 보고 싶었어요. 돈도 많이 준다고 하고 힘들게 인화하고 현상할 필요도 없고 해서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결국 거절했습니다. 한 번 (아날로그 작업에서) 손을 놓으면 다시는 못 돌아올 것 같았거든요."
"어렸을 적부터 비 오는 날이 가장 좋았다"는 작가는 지금도 화창한 날에는 거의 작업하지 않고 새벽이나 안개 낀 날, 눈이나 비가 오는 날처럼 육안으로 봐도 명암 대비가 별로 없는 날을 골라 작업한다.
"특별한 기법이나 재료가 있는 건 아니에요. 노출의 미묘한 차이를 이용하는 겁니다. 카메라 노출을 일단 이용하고 필름 현상할 때 이를 극대화하는 것뿐이죠."
국내 풍경을 찍은 사진이지만 민병헌의 렌즈에 잡힌 풍경은 어쩐지 낯설다. 어디에서 이런 사진을 찍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사진 그 자체를 하나하나 어딜까 보기보다는 마음으로 읽는 기분으로 느껴달라"고 말했다.
풍경을 주로 찍어온 작가는 최근에는 누드 초상 작업을 시작했다. 2000년대 초 잠시 시도했던 누드와는 달리 모델의 얼굴과 벗은 몸을 찍는 작업이라고 한다.
전시는 30일까지. ☎02-730-7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