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고향을 다녀왔다. 고향을 떠나온 지 너무 오래 되어, 이제 그곳에 가 보았자 알아보는 사람조차 없을 정도로 낯설다. 다만 마을 한 귀퉁이 언덕바지에, 먼저 간 어머니께서 한많은 세상일 잊고 편안히 잠들어 계실 뿐이다.
어머니가 묻힌 묘지에 가서 인사드리자 '왜 이제 왔느냐'며 한편은 꾸중을 하고, 또 한편은 반가워하는 모습을 마음속으로 느낀다. 송구스럽고 죄송해서 나는 묘소 근처만 이리저리 서성거린다.
"어머니, 용서하세요. 또 오겠습니다."
돌아올 땐 마음이 울적하고, 가슴 한가운데 무언가 응어리 같은 게 뭉클하게 치솟는다. 그리움이 남겨놓은 표적일 터이다.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늘 어머니가 떠오른다. 어머니란 누구일까.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서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던데, 그런 존재일까.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전쟁(6.25)이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세상이 몹시 시끄러웠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흉년이 겹쳤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모두 굶주림에 지쳐 있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이웃마을 잔칫집에 가셨던 어머니가 황급히 돌아왔다. 어려운 시절에 모처럼 잔칫집에 가셨으니, 오래 놀다와도 될 텐데, 어머니는 그렇지 않고 헐레벌떡 돌아와서 나를 찾더니, 나들이옷도 벗지 않은 채 젖가슴을 펼쳐 보였다. 어머니의 봉긋 솟은 두 개의 젖과 함께 드러난 가슴팍, 그곳엔 김이 무럭무럭 나는 떡이 달라붙어 있었다. 말만 들어도 군침이 넘어가는 떡이었다. 손에 들고 오거나 손수건에 싸 와도 될 텐데, 어머니는 떡이 식을까봐 가슴팍에 품고 왔던 것이다.
"식기 전에 먹어라."
어머니는 가슴팍에 붙은 떡을 넘겨주며, 이제야 안심이 되는 듯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떡은 정말 신기하게도, 방앗간에서 막 만들어낸 것처럼 부드럽고 맛이 좋았다.
그런데 그 떡이 왜 그리 맛있었던가를 깨달은 것은, 세월이 많이 흐른 후였다. 내가 부모가 되어,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였다. 자식이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오장육부를 다 꺼내줘도 아깝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안 뒤부터였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깨달음이란 언제나 삶의 뒤안에 숨어 있다가, 뒤늦게야 돌아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이자 국어학자인 이희승 선생은 <어머니> 란 시에서 "…하늘이라 하오리까/ 땅이라 하오리까/ 한낱 미물로/ 그 높이를 어이 아오리까/ 야중가리 없는 떡잎으로/ 그 넓이를 어이 헤아리오리까// 해에다 대오리까/ 달에다 비기오리까/ 가슴속에 스며드는/ 어머니의 사랑/ 볕밭보다 따뜻하오이다/ 달빛보다 서늘하오이다…"라고 썼다. 어머니>
요즘, 양로원이 잘된다고 한다. 들리는 말로는 '노인이 지내기에 편리한 곳'이라서 그렇다고도 하지만, 왠지 믿기지 않는다. 세상에 부모 자식간에 떨어져서 외롭게 살고픈 사람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혹시라도 자식이 부모를 버렸거나, 부모가 자식을 버렸던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한 일인가.
가을이다.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天高馬肥)고도 하지만, 그보다는 생각이 무르익는 계절이 아닌가 싶다. 들녘에 나가면 흔연히 널려 있는 오곡백과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를 되돌아보았으면 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삶도 이젠 부끄럽지 않고, 아름답고 풍요로워지기를 기대한다.
/김년균(한국문인협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