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판소리는 남자들만 부르던 것이었다. 판소리는 무당 가계의 남자들의 창조물이다. 그러기 때문에 애초부터 여자들이 판소리를 부르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안방이나 대청 등 가까운 거리에서 청중들을 마주하고 노래를 불러야 했기 때문에, 당시의 도덕률에 비추어 여자가 판소리를 부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기에 여자 창자가 일반화된 것은 서양식 무대가 도입되어 공연자와 청관중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 개화기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신재효의 시대에 여자 소리꾼이 최초로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진채선이다.
진채선의 성이 진(陳) 씨라는 것이 밝혀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진채선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 <조선창극사> >에는 성이 없이 '채선(彩仙)'으로만 되어 있었다. 채선이라는 이름도 보통 사람들의 이름과는 좀 다르다. 그래서 진채선은 기생 출신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런데 고창문화원장을 오래 한 이기화는 현장조사를 통하여 채선의 고향이 월산면 검당포이고, 그의 선대가 고창군 무장면에서 건너온 진 씨였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런데 강한영도 1975년 경에 고창에 와서 백방으로 수소문한 결과, 고창군 심원면에서 주막을 하는 진채선의 이질녀 김막례를 찾아냈다. 김막례는 무당 집안 사람이었다. 그래서 진채선의 성이 진 씨이며, 무당의 후손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조선창극사>
진채선 생가의 위치는 고창군 심원면 월산리 사등부락 522번지일 것으로 추정된다. 심원면 월산리는 검당, 사등, 죽림, 월산, 마산 등 5개 마을로 되어 있는데, 과거에는 검당에서 소금을 구웠기 때문에 검당이 가장 컸었다고 한다. 검당은 본래 천민들의 집단으로 거주지였으며,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소금 생산에 종사하고 있었다. 검당이 천민들의 집단 거주지였다면, 같은 천민이었던 단골 또한 가까운 곳에 살았다는 것이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무장 진 씨와 검당포 무당이 만났던 것일까? 전해오는 말로는, 진채선의 조부가 어려운 생활을 극복하기 위해 무장으로부터 검당포로 건너와서 과부였던 김당골과 함께 살게 되면서 진씨가 검당포에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김막례의 증언에 의하면, 채선이 유년시절에 당골 학습을 하는 어머니를 따라 다니면서 등 너머로 익힌 노래 솜씨가 당골 학습 선생에게 알려지게 되어 별도로 소리지도를 받게 된 것이 판소리 공부의 첫 인연이 되었는데, 나중에는 노래 솜씨가 소문이 나서 어머니를 따라 큰 잔칫집의 소리판에 다녔다고 하였다. 그 후 진채선은 처음 소리를 가르치던 선생이 신재효에게 다리를 놓아주어 신재효의 문하에 들어갔고, 거기서 본격적인 훈련을 받아 명창이 되었다고 했다.
진채선이 판소리 학습을 하는 과정이 어떠했는가에 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신재효의 각별한 배려 속에서, 신재효의 집에 드나들던 소리꾼들에게 소리를 배웠을 것이다. 신재효가 직접 쓴 <도리화가> 에는 진채선을 향한 절절한 애정이 담겨 있다. 이로 보아 신재효가 진채선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소리는 신재효의 집에서 소리 사범 노릇을 했다고 하는 김세종으로부터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도리화가>
소리공부를 마친 진채선은 1867년 한양으로 올라가 경복궁의 경회루 낙성연에 참여하였다. 진채선이 어떻게 해서 경회루 낙성연에 참여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재효가 경복궁 재건을 위해 돈도 내고, 노래도 지어 바쳐 임금으로부터 절충장군이라는 벼슬을 받았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신재효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진채선을 데리고 간 사람은 김세종이었는데, 여성이 먼 길을 간다는 게 힘든 시절이라 진채선은 남장을 하고 갔다고 한다. 소리도 남장을 하고 했다는 말이 전해 오고 있다. 진채선이 남자 복장을 하고 소리를 했다는 이야기는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확인된다.
그런데 대원군의 실각 후 대원군 곁을 떠난 진채선은 어디로 갔을까? 고창으로 돌아와서 신재효를 만났다고도 하고, 한양의 기생이 되었다고도 하고, 중이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진채선 이후 한참을 기다린 후에 우리는 허금파나 김초향, 이화중선 등 여자 소리꾼들을 만난다. 일제 초기에 활동했던 이들은 진채선이 닦아놓은 길이 있었기에 소리꾼의 길을 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이름도, 명예도 다 진채선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다.
/최동현(군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