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⑪회인(懷仁)의 「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

명대중기 이후 행서전범으로 추앙…하사시점부터 건립까지 무려 25년 소요

회인의 '집자성교서' 672년. (desk@jjan.kr)

중국 역사에서 수·당의 시대는 불교의 시대로 일컬어진다. 당대에 조성된 여러 성교서(聖敎序)는 당시 불교의 성흥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당대에 장안(長安) 홍복사(弘福寺)의 스님 회인(懷仁)이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는 당태종 이세민 서(序)를 짓고, 고종 이치(李治)가 기(記)를 지었으며, 제갈신력(諸葛神力)이 집자한 글자를 돌에 본뜨고, 주정장(朱靜藏)이 글자를 새겼다. 당 함형(咸亨) 3년(672) 12월에 세워졌는데 현재 섬서성 서안 비림(碑林)에 배치되어 있다. 이로써 회인의 「집자성교서」는 집자비의 효시가 되었다.

 

성교서란 현장삼장법사가 인도에서 전해온 불전을 한문으로 번역해서 당태종에게 바치자, 이 번역사업에 대한 공로로 정관 22년(648)에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가 하사되었으며, 또 고종에게서 「술삼장성기(述三藏聖記)」를 하사 받은 것을 가리킨다. 유명한 저수량의 「안탑성교서(雁塔聖敎序)」는 그 서(序)와 기(記)만을 새긴 것이지만, 회인이 만든 「집자성교서」는 현장의 사표(謝表)에 대한 태종과 고종의 답서를 새기고, 이어서 반야심경과 윤문에 참여한 우지녕(于志寧) 등 4인의 관함(官銜), 비를 새긴 두 사람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높이가 350cm, 폭이 113cm이며, 비두에는 일곱 명의 부처가 새겨져 있어 「칠불성교서」라고도 일컬어진다. 전문 1904자이며, 행마다 자수가 일정하지 않지만 1행에 최대 85~86자까지 배치되었다.

 

이 비의 글씨를 집자한 회인(懷仁)의 전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왕희지의 서법을 배운 승려로 추정된다. 왕희지를 혹애하여 그의 글씨를 수집한 당태종은 궁궐 내부(內府)에 많은 진적을 소장하고 있었다. 「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慈恩寺三藏法師傳)」에 따르면, 회인은 이 내부에 소장되어 있는 진적들을 토대로 집자한 것으로 보인다. 태종과 고종의 서기(序記)가 하사된 시점으로부터 비를 건립한 때까지의 기간은 25년이 걸렸다. 집서에 사용된 왕서는 난정서(蘭亭序)를 비롯하여 상란첩(喪亂帖), 봉귤첩(奉橘帖)과 같은 서첩들과 집첩인 「순화각첩(淳化閣帖)」 등의 행서첩이었다. 특히 「난정서」에서는 50여 자를 취하였다. 집자란 본디 그대로를 정밀하게 채집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글자의 조화를 위하여 간혹 확대하거나 축소하기도 하고, 없는 글자는 편과 방을 조합하는 방식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글자들을 하나씩 맞추다보면 기맥이 상실되기 때문에 자간과 행간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배치하는 일이다. 따라서 정밀한 집자와 더불어 집서자의 심미적 감각이 가미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집자성교서」를 세밀하게 분석해보면 글자의 크기에 따라 자간이 달라지며 일정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 행(行)도 수직으로 내려오듯 일렬로 배치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굴곡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집자비의 자연스러움을 염두에 둔 배려로 보인다.

 

이 비가 건립된 후, 이 집자비의 서법을 이어받은 이른바 '원체(院體)'가 생겨날 정도로 중시되었으며, 명대 중기 이후에는 탑모서인 「난정서」와 더불어 행서의 전범으로 추앙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비는 명나라 말기에 사선으로 깨졌기 때문에 그 이전에 탁본을 뜬 미단본(未斷本) 송탁(宋拓)이 특히 중시된다. 송탁으로 유명한 것은 묵황본(墨皇本), 섬서본(陝西本), 고도본(高島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