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현의 명창이야기] ⑪동편제 판소리의 상징 송만갑(1)

"집안의 전통소리 안 지켰다" 아버지로부터 혼쭐…박유전 소리 세상에 알려진 후 동편제·서편제라는 개념 생겨

송만갑은 동편제 판소리를 상징하는 사람이다. 「조선창극사」에는 송만갑이 자기 집안의 소리를 고수하지 않고 바꾸어서 불렀기 때문에 아버지인 송우룡이 죽이려고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런데 송만갑의 소리는 장단에서 대마디대장단을 사용한다든가, 소리 끝을 끊어서 발성을 한다든가, 목으로 우긴다든가, 우조 중심으로 소리를 엮어나간다든가 하는 동편제 판소리의 규범에 가장 잘 맞는다. 송씨 집안은 송흥록, 송광록, 송우룡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동편제 판소리의 종가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송만갑을 동편제 판소리의 '금지옥엽'이라고까지 부른다. 송흥록을 '가왕'으로 부르니 그의 종손인 송만갑을 '금지옥엽'이라고 부르는 것도 크게 잘못되었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집안의 전통 소리를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쫓겨난 사람의 소리가 어떻게 해서 동편제 판소리의 규범에 가장 잘 맞는가이다.

 

우리는 동편제니 서편제니 하는 개념이 동편제 판소리나 서편제 판소리의 시조라고 일컬어지는 송흥록과 박유전 당대에 생긴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송흥록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박유전이 없었다. 그렇다면 서편제 소리로 일컬어지던 소리는 없었다. 그냥 판소리가 있었을 뿐이다. 송흥록의 소리가 동편제 소리가 되기 위해서는 박유전의 서편제 소리가 나와야 한다. 박유전의 소리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냥 판소리만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다가 양식이 다른 박유전의 소리가 나오자 송흥록의 소리와 구별하기 위해 동편제와 서편제라는 개념이 생겼다. 그렇다고 해도 박유전이 세상에 나와 이름을 떨치자마자 동편제와 서편제로 불렀다고 할 수는 없다. 박유전의 소리양식과 같은 소리를 서편제라는 이름으로 부르기까지는 이 소리가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박유전 한 사람의 소리만을 가지고 동편제 송흥록 계열의 소리에 대립시킬 수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동편제 서편제라는 판소리의 개념이 만들어진 것은 박유전의 소리가 세상에 널리 퍼진 이후의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논리적으로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그 때가 언제쯤일까? 박유전의 제자들이 왕성하게 활동할 때가 아닐까? 그 시기는 아마도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쯤일 것이다. 그런데 이때 송만갑 이전의 소리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녹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동편제 판소리는 송만갑, 서편제 판소리는 살아 있는 김채만이나 김창환의 소리를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송만갑이 동편제 판소리의 전통을 벗어났다고 하면서도, 동편제 판소리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송만갑의 출생지도 논란거리이다. 그 동안 송만갑은 구례 출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송만갑이 구례에서 살았다는 것은 호적으로 확인이 된다. 그런데 최근에 발견된 송만갑의 자서전에는 자신이 낙안에서 났으며, 박만순에게 배웠다고 하였다. 박만순은 송흥록의 수제자로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송만갑이 낙안에서 살았던 것도 호적으로 확인이 된다. 문제는 낙안에서 산 시기가 구례에서 산 시기보다 나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낙안 출신이라고 하였으니, 공식적인 서류와 송만갑 자신의 증언이 어긋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낙안과 구례군은 서로 송만갑의 출생지라고 우기게 되었다.

 

이 싸움은 아무래도 쉽게 결판이 날 것 같지는 않다. 송만갑이 근대를 대표하는 명창인 데다가 동편제를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어느 지역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낙안은 낙안대로 구례는 구례대로 송만갑을 추모하는 축제를 벌인다. 이 과정에서 결국은 대중들의 지지를 더 받는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있다. 그 때까지는 아무래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동안 두 지역은 서로 경쟁할 것이다. 그것이 판소리를 위해서는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최동현(군산대 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