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복사단비(興福寺斷碑)'는 본래 서안성(西安城) 안의 흥복사(興福寺)에 세워져 있었는데 어느 때인가 망실되었다가, 명나라 만력(1573-1620) 말년에 남쪽의 공호(空濠)를 준설하다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반부의 약 93×126cm의 잔비 밖에 없었다. 출토 후 얼마 되지 않아 공자묘(孔子廟)로 이치되었으나, 지금은 서안의 비림(碑林) 제2실에 열치되어 있다. 비문은 35행, 행내의 자수는 22~25자, 전문 약 730자를 새기고 양측에는 화려한 당초문양과 선인기승(仙人騎乘)의 서수(瑞獸)를 선각(線刻)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비주(碑主)의 매장에 가까운 개원(開元) 9년(721)으로 추정된다. 비두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원명은 확실하지 않다. 십 수종의 별칭 중에는 '吳文'을 덧씌운 호칭이 많았다. 그 이유는 청대의 금석학자인 옹방강이 비문의 첫부분을 판독하면서 '惟大將軍吳公諱文'이라 석문을 달았는데, 이는 '惟大將軍矣. 公諱文'의 '矣' 상부를 'ㅁ'로 잘못 본 것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밝혀진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흥복사단비'라고 칭한다.
비문의 제2행에 '(…) 大雅, 集晉右軍將軍王羲之行書勒上'이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 역시 '집자성교서'와 같은 집왕서비(集王書碑)의 하나이다. '집자성교서'(672)보다 50년 뒤에 조성되었는데, 이 사이에 오광벽(吳光璧)이 집자한 '건복사 삼문송성비(建福寺三門頌成碑)'(717), 행돈(行敦)이 집자한 '회소율사비(懷素律師碑)'(718)가 있다. 이처럼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비는 집자성교서 이후 원대에 걸쳐 20종 정도가 금석서에 열거되어 있다. 집서자인 흥복사의 대아(大雅)와 그 집서(集書)의 사정에 대해서는 일체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필자의 생각에 대아(大雅)는 그 자체만으로 이름이 될 수 없고 이름 뒤에 붙여 고상함을 나타내는 말이므로, 이 두 글자 앞에 흥복사에 거주하며 집서를 담당했던 스님의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이 비를 가장 먼저 거론한 명나라 조함은 왕희지의 진적에서 직접 집자한 것이 아니라 '집자성교서'에서 모집(摹集)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 서품에 대해서는 '집자성교서'와 우열을 다투고 있으나 훼예는 서로 반반이다. 청대의 학자 고상선(郭尙先)은 "'집자성교서'는 천고의 걸작이지만 글자와 글자가 지나치게 붙어 자유로움을 해치고 있는 것이 결점이며, 이 비는 행을 세움에 융통성이 있어 고목(古穆)한 정취를 갖추고 있는 것이 장점이다."라고 평하였다. 또한 '집자성교서'가 왕법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는 인정하면서, 요컨대 당인(唐人)으로서 회인(懷仁) 자신의 해석이 들어간 서법이라고 말한 것은 탁견이다. 일본의 西林昭一는 '집자성교서'는 원래의 글자를 비교적 충실하게 본뜨고자 유의하고 있으나, '흥복사단비'는 집자에서 진인(晉人)의 여유 있는 풍운(風韻)과 폭 전체의 기맥을 중시한 점에 특색이 있다고 하였다.
당태종의 왕희지에 대한 열정에서 볼 수 있듯이 당대는 왕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당대의 초당삼대가는 왕서에 대한 치밀한 해석력으로 해서의 전형을 확립하고, 나아가 왕희지 진적을 통한 집자가 처음으로 행해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집자성교서'와 더불어 '흥복사단비'는 진적에서 느낄 수 없는 굳건한 필력과 골기를 체득할 수 있는 집자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