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현의 명창이야기] ⑬이동백과 새타령

예술적 완성 게을리하지 않은 '우리시대 명창'…정 3품 통정대부 벼슬 당시 '최고 대우'

이동백은 충청남도 서천군 종천면 도만리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중고제 판소리의 시조인 김성옥의 아들 김정근에게 배웠다. 충청도가 중고제의 고장인 데다가, 이동백의 스승이 중고제 시조의 아들인 김정근이기 때문에 이동백을 중고제 소리꾼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동백은 서편제 소리의 대가인 이날치에게도 배웠기 때문에 호남 판소리의 창법을 많이 구사한 사람이었다. 그가 장기로 삼아 자신의 등록상표가 되었던 <새타령> 도 박유전 이날치를 거쳐서 내려온 민요 <새타령> 이다. 이동백은 <새타령> 을 잘 불렀기 때문에 판소리를 하다가 곳곳에 <새타령> 을 끼워 넣어 불렀다고 한다. 실제로 이동백이 중심이 되어 녹음한 <춘향전전집> 에서도,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가는 대목에서 느닷없이 <새타령> 을 부르고 있다.

 

이동백은 오명창 중에서도 일급 대우를 받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레코드 취입을 할 때나 공연에서 보수를 지급할 때 가장 돈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지금 들으면, 전라도 사람에게는 이동백보다 정정렬의 소리가 더 판소리답게, 멋있게 들리지만, 일제강점기 때만 하더라도 이동백의 소리가 훨씬 더 인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동백은 소리꾼 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을 받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정3품 통정대부 벼슬을 받았는데, 통정대부부터는 이른바 당상관에 든다. 요새로 말하면 고급공무원인 셈이다. 물론 그 벼슬이 실제 직책을 수행하는 벼슬이 아니고 이름뿐인 것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별 게 아니었겠지만, 천민이었던 소리꾼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소리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이동백이라는 이름보다는 이통정이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이동백의 사진 옆에 걸린 족자에 쓰인 시에는, "타고난 자질이나 성량을 따를 자 없는데, 춘당대 잔치에 임금 은혜 감격스럽네. 여산의 삼천 척이나 되는 폭포가 남원고을 암행어사 출도시에 떨어지는 듯하다"고 하였다. 이동백은 소리꾼으로서의 타고난 자질이 뛰어났는데, 그 중에서도 성량이 매우 컸다는 것을 표현한 듯하다. 실제 이동백은 남자인데도 여자 소리꾼보다 더 높은 음을 낼 수 있었다. 게다가 맑은 천구성과 거친 수리성을 다 낼 수 있었다. 그래서 정노식도 「조선창극사」에서 이동백의 목소리를 '미성'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동백의 사진을 보면 이동백은 풍채가 뛰어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인물이 잘생기다 보니 여인들과의 일화도 전해온다. 이동백이 창원에서 활동할 때는 어떤 청상과부가 이동백을 좋아하여 목숨을 걸고 구애를 하는 통에 결국은 같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또 김창룡의 동생 김창진도 명창이었는데, 김창진이 이동백의 여인을 훔쳐갔기 때문에 이동백에게 심한 견제를 당하여 실력만큼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도 한다. 젊었을 때는 청상과부가 목숨을 걸 만큼 멋이 있었던 이동백도 나이가 들다보니 더 젊은 김창진에게 여인을 빼앗기는 처지로 전락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명창은 대부분 1940년 이전에 세상을 떴다. 그런데 이동백은 1950년까지 살았다. 죽을 때까지도 늘 소리 연습을 했다고 한다. 죽을 때에는, 이제 소리를 알 만하니 죽게 되었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생전에 최고 대우를 받은 명창이었으면서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예술적 완성을 위해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은 그 정신이야말로, 이동백을 진정한 명창으로 만든 바탕이었을 것이다.

 

/최동현(군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