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파 속에서 살아온 세상을 되짚어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오랜 세월을 음지에서 보냈지만, 내 삶은 양지였다."
40년 넘게 변호사로 활동해 오면서 법률서와 평론집, 시집, 수필 등 30여권의 책을 냈지만 정작 자서전을 펴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한승헌 변호사(75·전 감사원장). 그에게 올 한해는 특별한 의미가 따랐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늘 분주했던 그가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보는 작업으로 한겨레신문에 자전적인 글을 연재했고, 그 글을 다시 정리하고 보충해서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 이란 단행본을 낸 것이다. 한>
한해가 저물어가는 연말, 서울 남대문로에 있는 법무법인 광장 사무실에서 한 변호사를 만났다.
한국 현대사를 주름잡을만한 민주화운동과 시국사건 법정의 중심에 있었던 한 변호사는 "나무는 조용히 있고 싶은데 바람이 멈춰주지를 않았다"(樹欲靜而風不止)라는 말로 회고를 대신했다.
▲ 불의한 권력, 의로운 수난자를 증언하다
무소불위의 군사독재정권 시대의 '시국사건 변호인 1호'.
한 변호사의 이름 뒤에 항상 따라붙는 명예로운 훈장(?) 같은 수식어다. 이번에 펴낸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 역시 무고한 수난자들과 고락을 함께 한 증언록이다. "나 자신에 관한 고백 외에 불의한 권력과 의로운 수난자들에 대한 증언에 무게를 뒀다"는 한 변호사는 '증언'쪽에 의미를 부여했다.
신문에 연재된 83회 분량의 글에 가족과 신앙, 건강 등 개인적 삶을 보완해서 엮은 이 책의 자료 사진은 모두 한 변호사 자신이 직접 챙긴 것이었다. 그는 "살아오면서 비교적 자료를 많이 모아온 편"이라고 담담하게 표현했지만 그의 자료수집에 대한 치밀함은 널리 알려져 있다.
글을 실었던 신문사 기자들이 놀랐을 정도로 다양한 자료를 갖고 있는 그는 "그 중에서 시국사건에 관련된 사진들은 널리 공유해야 할 귀중한 자료인 만큼 언젠가 따로 분류해서 공개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의 자서전은 '현대사의 굴곡과 비사를 생생하게 담은 책''반독재·민주화 시대의 실록'등등의 평가를 받고 있다. "귀한 신문 지면에 사적인 이야기만 쓸 수 없었다"는 그는 자신이 변호한 굵직한 시국사건을 알기 쉽게 정리해 실었다.
▲ 법정 판결과는 다른 진실의 기록
"내가 만난 피고인 중에는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일신의 위험을 돌보지 않고 나서서 헌신하다 독재권력에 의해 박해받은 양심수들이 많았다. 그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역사 위에 큰 발자국을 남긴 사람들이다. 내가 법정의 판결과는 다른 사건의 진실을 기록하려고 노력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피고인은 변호사를 잘 만나야 한다고 하지만, 실인즉 변호사는 피고인을 잘 만나야 한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던 한 변호사는 자신이 '잘 만난' 피고인들에게서 오히려 정신적 깨달음을 얻었고, 그래서 인간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가난한 가정에서 암에 걸린 어머니가 아들의 무사 졸업을 고대하며 고통을 참고 있는데도 학생운동에 나섰다가 징역을 살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던 대학생, 각서 한 장 써서 던지면 풀려날 수 있는데도 이를 거부해 10년이나 수감생활을 더 하고 나온 젊은이들은 아직도 그의 기억 속에 가슴 아픈 모습으로 남아 있다.
▲ 안타까운 민주주의와 인권의 역류
지난 2005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장을 맡아 사법 개혁의 근간을 마련했던 한 변호사가 바라보는 2009년 우리나라 사법부의 모습은 어떨까.
"오랜 고통과 수난, 그리고 끈질긴 저항을 거쳐 민주주의와 인권을 쟁취해 세계의 주목과 칭송을 받았는데, 현 정부 들어서 그것이 흔들리고 역류되는 현상이 잇달아 걱정스럽다."
검찰권의 행사에 대해서'산 권력에는 약하고 죽은 권력에는 가혹하다' 는 세평이 나도는 것 또한 유감스럽고 마음 아프다고 했다.
"사법부가 검찰의 과오를 극히 일부나마 견제 시정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어떤 사건에서는 의문과 우려를 자초하기도 했다"며 "사법부의 독립엔 외풍도 문제지만, 법원 안의 '내풍'또한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변호사는 용담댐 건설로 고향(진안군 안천면)이 물에 잠겨 '통일이 돼도 갈 곳이 없는 절대 실향민'이 되었지만 고향 사랑이 각별하다.
고향 발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이런 당부를 잊지 않았다.
" 전북이 국정에서 소외당하지 않도록 지역 안에서의 갈등을 접고 우리 목소리와 역량을 하나로 결집시켜야 한다. 나도 적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