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호의 클래식과 친해지기] ⑮조국통일 소원한 윤이상의 클래식

탁월한 재능 불운한 일생

"나는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서양에서 숨 쉬고 있습니다. 나의 분신인 음악작품은 나의 진실입니다."

 

20세기 클래식에 큰 공헌을 한 윤이상은 두고두고 우리나라를 빛낼 음악가이다. 서양음악계에서는 유명한 그를 정작 우리는 왜 잘 모르는 걸까?

 

핀란드의 대통령이 누구인지, 누구이었는지 세계인 거의가 모른다. 그러나 교향시 <핀란디아> 를 작곡한 시벨리우스가 핀란드 음악가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클래식은 한 국가의 위상을 그렇게 세계에 알리는 것이다. 윤이상은 그런 귀한 긍지를 우리에게 안겨준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훌륭한 음악가이다. 핀란드는 시벨리우스에게 강산 수려한 곳에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집을 마련해주고 그 집 상공으로는 비행기도 못 다니게 했다. 우리나라는 분단된 남북을 오간 윤이상의 통일지향적 행적을 문제 삼아 그를 국외로 추방하였고 그가 그렇게 원하던 조국의 품에서의 죽음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윤이상 음악에 대한 평가를 지금은 올바르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윤이상은 1917년 경남 통영(지금은 충무) 근처 산청에서 태어났다. 8살에 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오르간을 통해 서양음악을 접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작곡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인근 초등 및 중·고등학교의 교가를 작곡하였다. 음악공부를 반대하던 아버지의 의견을 뒤로하고 화성학 및 고전음악을 공부하였고 18세부터는 일본을 오가며 첼로와 음악이론을 공부했다. 27세 때는 반일운동으로 체포되어 감옥에서 폐결핵을 앓기도 했고 4년후에는 통영여고 음악교사를 하기도 했다.

 

공부가 부족함을 느낀 그는 39세 때 프랑스로 유학하여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공부하였고 이듬해 독일 (서)베를린음악대학으로 전학하여서는 슈바이츠 쉴링에게서 대위법과 푸가를, 보리스 블라허에게 작곡을, 쇤베르크 제자 요셉 루퍼에게서는 12음기법을 배웠다.

 

독일 다름쉬타트 현대 음악제에서 12음 기법에 토대를 둔 <피아노를 위한 다섯 소품> <일곱악기를 위한 음악> 등으로 주목을 받게 되고 활발한 작품발표를 계속하여 '20세기 중요작곡가 56인' '유럽의 현존하는 5대 작곡가' 등에 선정되며 20세기 클래식의 중요한 작곡가가 되는 것이다. 1995년 5월에 독일 자아르브뤼켄 방송에 의해 20세기 100년을 통털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던 그는 1972년 베를린 음악대학의 명예교수로 임명된 후 1977년부터 1987년까지 정교수로 재직하였고 1985년에는 튀빙엔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1987년 '독일연방공화국 대 공로훈장'을 비롯 수상경력도 수 없이 많다.

 

그는 그의 대표적 작곡기법 '주요음향기법' 혹은 '중심음법칙'을 12음기법과 용해하여 새로운 음악세계를 구현했다. 중심음 법칙이란 조성이 없어진 20세기 음악에서의 조성음악이 갖는 으뜸음 역할을 진지하게 숙고한 어떤 한 음 혹은 한 음향으로 설정하여 그를 다양한 변화들로 장식하는 작곡기법이다. 전통악기 피리를 서양악기 오보에로, 해금을 바이올린으로, 아쟁을 첼로로 대신하는 등 우리 전통정서를 서양악기로 표현하며 전통음악의 '시김새'나 '농현' 기법을 미끌어지는 소리 '글릿산도'나 변형된 '비브라토(떨림소리)'로 표현하여 그 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발현한다. 작품 제목도 <예악 reak> <바라 bara> <가사 gasa> <가락 garak> 등 우리 정서가 가득 배인 작품들을 많이 작곡하였다. 우리의 민속설화 <심청전> 을 <심청> 이라는 오페라로 작곡하여 큰 주목을 받기도 했던 그는 우리나라를 중심한 동아시아 음악과 유럽음악의 융합을 이룬 최초의 작곡가로서도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