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청룡(靑龍), 남쪽은 주작(朱雀), 서쪽은 백호(白虎), 북쪽은 현무(玄武) 등 '사신도(四神圖)'에 등장하는 신물(神物)중에 실존한 것은 백호뿐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개 다음으로 기록이 많은 것이 호랑이로 600여 군데의 기록이 등재되어 있을 뿐 아니라 10만 509개의 자연이름 중에 호랑이와 관련된 지명이 284개, 산명이 47개, 고개 이름이 28개, 바위 및 도서명도 각 10개 등이라고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표하였다.
의리와 맹용을 겸비한 호랑이가 우리의 영수(靈獸)라면 인도에는 코끼리, 중국은 용, 이집트는 사자를 영수로 꼽고 있는 것은 그 나라의 정서와 속설이 부합되기 때문이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도 호랑이의 정기를 받았다고 한다. '고려사'에 의하면 호경(虎景)이라는 사람이 개성 송악산에서 살았는데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하루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사냥을 갔다가 날이 저물어 굴속에 들어가 잠을 자는데 호랑이가 굴 밖에서 으르렁 거릴 때 호경이 혼자 호랑이와 싸우려고 나간 순간 굴이 무너져 다른 사람은 몰사하고 호랑이는 오간데 없었다. 잠시 후 호신(虎神)이 나타나 호경과 부부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왕건의 선조인 강충(康忠)이었다.
완산지(完山誌)에 조선조를 창건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穆祖 李安社)와 호랑이와의 사연이 기록 되었는데 전주 교동의 동쪽 산자락에 위치한 오목대(목조의 구거지로 1380년 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에 들려 종친들과 개선연을 베풀었던 곳) 부근에서 어린 목조가 마을 친구들과 함께 놀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자 돌 밑의 굴로 비를 피하고 있을 때 호랑이가 굴 밖에서 으르렁 거렸다. 이때에 목조가 희생을 각오하고 나왔는데 호랑이는 간곳이 없고 굴이 무너져 굴속의 친구들은 모두 죽었고 큰 바위(虎隕石)가 굴러 지금의 한벽루(寒碧樓) 초석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후백제의 견훤(甄萱)도 호랑이의 젖을 먹었다는 설화도 있어서 호랑이와의 친밀감을 더해주고 있다.
464개의 호랑이 설화를 보면 위에서 기록한 좋은 점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납고 무서운 것도 많다. 공자께서 어느 산길을 가는데 젊은 여인이 새로 만든 묘앞에서 슬피 울고 있자 연유를 물은즉 "재작년에는 호랑이가 시아버지를, 작년에는 시어머니를, 그리고 이번에는 우리 남편을 죽였다"고 하였다. "그러면 호랑이가 없는 곳으로 이사하지 않고 이곳에서만 살면서 호식(虎食)을 당하느냐"고 하자 "그래도 이곳에는 까다로운 법이 없어서"라 하여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 한다. 얼마나 무서우면 호랑이호(虎)자를 등에 붙이면 학질이 도망갈까?
중국과 한국이 근세이후 오랫동안 단절의 역사를 걸어오다가 1992년 수교를 재개할 때에 중국의 최고지도자인 장쩌민(江澤民)국가주석이 한국을 공식 방문하면서 갖고 온 선물이 곧 '동북산(東北産)호랑이'였다. 중국인들도 한국민족과 호랑이와의 관계를 미리 알았던 모양이다. 동북산이라는 것은 중국이 자기들의 개념으로 부르는 말이다. 자기들의 동북지방인 지린성(吉林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일대에 사는 호랑이라는 뜻인데, 크게 보면 시베리아 호랑이라는 것이요, 굳이 우리에게 이롭게 이야기한다면 백두산일대에서 서식하는 호랑이이기 때문에 백두산호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야생상태의 호랑이를 볼 수는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만큼 우리민족이 예로부터 가져왔던 친밀한 관계는 추억 속으로, 문헌 속으로 들어가고 말 것이다. 또 우리 속에 갇혀있는 호랑이를 보면서 선조들이 가졌던 그 감정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1988년 우리나라에서 열렸던 올림픽때에 세계인들을 맞이했던 마스코트였던 그 호돌이는 영원히 살아있어야 한다.
/양복규(동암학원이사장·명예교육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