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명 있는 것들과 더불어 인본주의를 규탄한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사정하건대, 걸을 때 제발 쿵쿵거리지 좀 마시라!"로 끝나는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는 이 토끼는 바로 IQ 200의 '천재토끼 차상문'이다.
김남일(53) 씨의 신작 장편소설 '천재토끼 차상문'(문학동네 펴냄)은 이 범상치 않은 주인공 차상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자못 장대하게 풀어낸 소설이다.
차상문은 1950년대 중후반 시골 여교사이던 어머니가 폭력적인 경찰 수사관에게 겁탈당한 결과로 태어난다.
토끼답게 다리가 팔보다 훨씬 길고 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지만, 인간처럼 말하고 생각하며 누구보다 머리가 좋다.
겁 없고 폭력적인 인간 영장류인 동생 차상무와는 여러모로 대비됐던 그는 미국 버클리대로 유학을 떠나 세계 각지에서 온 다른 토끼 영장류를 만나 사고의 지평을 넓혀간다.
이후 그는 몇 번의 전환기를 맞으면서 인간들을 향해 여러 방식으로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땅이 놀라니 걸을 때 쿵쿵거리지 말라"거나 "시베리아의 우디헤어나 알래스카의 에약어 같은 사라져가는 소수어를 지키자"라는 그의 주장은 전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이웃과 주변, 그리고 장구한 세월 억조창생이 이끌어온 역사와 시간, 기억과 꿈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고 배려해야 한다. 시간적으로는, 당신들의 현재가 과거의 소중한 유산이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종자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 공간적으로는, 당신들이 지구의 유일한 주인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말 그대로 억조창생이 더불어 사는 공간인 것이다. 게다가 당신들은 생각만큼 영리하지도 않다."(328쪽)
작가는 이 소설 속에 '쿠나바머'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상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실존 테러리스트 시어도어 존 카진스키, 일명 '유나바머'의 이야기에서 이 소설이 싹텄다고 말한다.
가히 수학천재라고 불릴 만했던 그는 버클리대 최연소 종신 교수직을 마다하고 숲 속에서 은둔하다 산업 문명을 상대로 한 테러를 일삼게 된다.
작가는 이 잔혹한 테러리스트에게 소심한 토끼의 옷을 입혀 그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유나바머가 품었던 뜻을 더욱 신랄하게 전한다.
작가가 솜씨 좋은 입담으로 전하는 차상문의 인생 역정을 듣다 보면 "인간이 과연 진화의 마지막 단계인가", "인류 문명은 과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하는 질문이 결코 우문(愚問)이 아닌 것처럼 들린다.
368쪽. 1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