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속으로 들어온 영화 한 편

계간 '시인세계' 봄호 특집

"깜깜한 식솔들을 이 가지 저 가지에 달고 / 아버진 이 안개 속을 어떻게 건너셨어요? / 닿는 것들마다 처벅처벅 삭아내리는 / 이 어리굴젓 속을 어떻게 견디셨어요?"

 

정끝별 시인의 시 '안개 속 풍경'을 읽으면 비슷한 제목의 유럽 영화가 떠오른다.

 

아버지를 찾아나선 남매의 여정을 그린 테오도로스 앙겔로플로스 감독의 영화 '안개 속의 풍경'은 실제로 아버지에 대한 정 시인의 시에 직접적인 영감을 줬다.

 

시인은 "삼십 대 초반에 '안개 속의 풍경'을 본 직후였거나 영화를 떠올리며 썼을 것"이라며 "그 영화는 내게 한 편의 영화라기보다는 한없이 척박하고 한없이 막막하고 한없이 습습했던 한 편의 회화이자 한 편의 음악으로 기억됐다"고 말한다.

 

한 편의 영화가 시인들을 거쳐 한 편의 시로 탈바꿈하는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계간 '시인세계'는 봄호에 '내 시 속에 들어온 영화'라는 제목의 기획특집을 마련해 시인 16인에게서 영화와 시 이야기를 들어봤다.

 

"좋은 영화는 직접 체험보다 더 감동적"이라는 유안진 시인의 말처럼 한 편의 좋은 영화는 시인들에게 그 어떤 체험보다도 압도적인 영감을 주기도 한다.

 

마광수 시인은 숀 코너리가 주연한 '바람과 라이온'에서 모로코왕이 노예를 방석 대신 깔고 앉는 장면을 보고 곧장 시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를 써내려갔다.

 

그는 "그야말로 '영감'의 덕을 본 작품이었다"며 "시어 하나하나를 면밀하게 짜고 다듬어 쓴 시가 아니라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시구들이 금세 완성도 있는 시로 탈바꿈한, 나로서는 흐뭇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던 시"라고 회고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시절'이라는 뜻의 영화 '화양연화'는 이병률 시인을 통해 동명의 시로 되살아났다.

 

시인은 "나에게 이 영화는 그림이며 음악이며 사진이며 여행이었다. 보는 것과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의 모두였다"며 "이 영화는 그 모든 걸 거느리며 여전히 아직도 내 깊숙한 힘줄에 관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권혁웅 시인의 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손택수 시인의 시 '범일동 블루스'는 모두 동명의 영화에 빚을 지고 있지만, 영감을 준 것이 영화 내용 자체는 아니었다.

 

영화의 포스터가 시의 모티브가 됐다는 권 시인은 "우물에 빠진 돼지는 처음부터 부조리를 품고 있다"며 "그 돼지가 멱따는 소리를 낸다면? 우아하게 몸을 날린다면? 거기에 윤동주처럼 모습을 비춰본다면? 죽음과 죽임 다음에 따라올 부활의 드라마가 전개된다면? 이런 상상을 잇대어 시로 표현한 것이 이 시"라고 말했다.

 

또 손 시인은 "어찌 된 영문인지 나는 아직도 그 영화(김희진 감독의 '범일동 블루스')를 보지 않은 상태"라며 "다만 영화 제작 발표회 뉴스를 보고 영화 제목에 강한 흡입력을 느꼈다는 것만은 고백해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