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누구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느냐면서 무슨 무슨 자동차로 당신을 대변하라고 유혹하는 광고가 있다. 그 속물적 천박함에 짜증을 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자동차로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 보이려는 건 우리 시대의 '상식'이 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좀 달라졌지만, 그 상식이 드라마틱하게 실천되는 시즌이 바로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었다.
설이란 무엇인가? 여러 정의가 가능하겠지만, 그건 '자동차 전쟁'이기도 하다. 고향을 찾는 민족대이동의 주요 수단이 자동차이기 때문이다. 괴로운 전쟁이지만, 과거를 생각하면 그래도 견딜 만 하다. 고향에 가기 위해 며칠 또는 수십일간을 걸어야 했던 시절, 기차나 버스를 놓치면 고향에 갈 수도 없었던 시절을 생각해보라.
독일 역사가 쿠르트 뫼저(Kurt M?ser)의 「자동차의 역사 : 시간과 공간을 바꿔놓은 120년의 이동혁명」(김태희·추금혼 옮김, 이파리, 2007)을 읽으면서, '자동차 전쟁'을 조금은 너그러운 시선으로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다.
"자동차에 대한 공격중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건은 1913년 헨닝스도르프 근처에서 일어났다. 양쪽의 가로수에 묶인 철사가 한 운전자와 그 부인의 목을 잘라 버렸고 뒷좌석에 앉아 있던 두 딸들은 부상을 당했다. 범인이 잡히지 않은 이 암살사건 이후 많은 자동차에 '철사 퇴치' 장치가 부착되어 만약의 경우에 그것이 탑승자의 머리 위로 올라가도록 했다."
자동차 지붕이 없던 시절에 일어난 일이다. 이 끔찍한 사건은 자동차의 출현 초기에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자동차에 대한 반감과 공격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자동차는 특권층의 전유물인데다 자유롭게 뛰어놀던 길을 빼앗아가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동차를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했다. 1904년 미국 뉴욕시에서는 자동차에 대한 투석(投石)이 어찌나 격렬했던지 경찰이 출동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자동차에 대한 공격은 그만큼 사람들이 자동차에 대한 동경이 강했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1905년의 미국의 최고 히트 가요는 "함께 떠나요, 루시. 내 즐거운 올즈모빌을 타고"였다. 어떤 필자는 "자동차는 현대의 우상이다. 차를 가진 사람은 여성들에게 신(神)이나 마찬가지다."고 썼다.
대중의 자동차 우상화를 정치적으로 가장 잘 이용한 인물이 독일의 히틀러다. 히틀러는 1933년 전 국토에 대규모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아우토반 건설계획'을 발표한 데 이어, 1934년엔 자동차가 '특권계급의 독점물'인 현실을 성토하면서 국민이라면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국민차(Volkswagen)' 생산을 선언했다. 1938년 최초의 국민차인 폭스바겐38이 출시되자, 히틀러는 '강함과 기쁨의 차' 저축운동을 통해 모든 노동자가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게끔 하겠다고 장담했다. 이 운동은 당시 독일 대중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히틀러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스페인의 프랑코도 자동차를 '국가·민족의 영광을 위한 실체이자 상징'으로 이용하였다. 유럽의 파시즘을 가리켜 '자동차 파시즘'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파시즘은 아니었지만, 한국민이 국가에 대한 긍지를 느끼게 된 최초의 사건 중의 하나도 바로 자동차였다. 1986년 자동차 수출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이른바 '약소국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국가주의적 애국심을 일깨워 주었는데, 당시 김동길 연세대 교수가 정주영 현대 회장을 존경하게 된 것도 순전히 자동차 때문이었다. 김동길은 "내가 정주영씨를 한국의 거인으로 평가하기 시작한 것은 85년인가 캐나다 강연을 가서 때마침 그곳에 상륙한 현대자동차의 포니 승용차를 목격한 그때부터였다"고 말했다. 그는 포니 승용차 안에 타고 있던 백인 젊은이들이 "가서 껴안아 주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피조물"이었으며, "정주영은 한국인 모두에게 긍지를 심어준 민중의 영웅이다"고 단언하였다.
6·25 시절 자동차에 탄 미군에게 껌과 초콜렛을 구걸했고, 미군부대에서 흘러 나온 드럼통을 펴서 차체를 만들고 노후화된 미군 지프 엔진과 변속기, 차축 등을 조립해 만든 '시발(始發) 자동차'를 신기하고 뿌듯하게 여겼던 한국의 아이들이 커서 자동차를 만들어 미국에 팔아 먹었다는 건 김동길 세대에겐 그야말로 살 떨리는 감격이었을 것이다.
사정이 그와 같은데, 성공하겠다며 고향 떠나 서울로 간 사람들이 설이나 추석에 고향을 찾으면서 무얼 보여주고 싶었겠는가. 80년대말부터 설이나 추석에 고향방문을 할 땐 빚을 내서라도 자가용 승용차를 몰고가야 한다는 '상식'이 유포되기 시작했고, 자동차 회사들은 그걸 마케팅 전략의 핵심으로 삼았다. 1992년 설날엔 "안전한 르망이 있어 더욱 즐거운 설날 귀향길- 우리집 새 가족 르망과 함께 고향길을 달려 갑니다"라는 구호가 요란하더니 그해 추석을 앞두곤 "엑셀 특보! 지금 계약하시면 추석 연휴때 타실 수 있습니다"라는 선전구호가 난무했다.
실제로 승용차가 가장 많이 팔리는 성수기는 추석과 설날을 앞둔 몇주일간과 피서철이었다. 또 중고차 시장에 매물이 가장 많이 나오는 시기는 추석, 설날, 피서철이 끝난 직후였다. 명절을 맞아 고향에 가는데 객지에서 성공했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알리는 데에 승용차 이상 좋은 것이 없었다. 설사 객지에서 변변치 않게 살고 있다 하더라도 번듯한 승용차를 몰고 가서 체면을 유지할 수는 있었다. 옷차림으로 성공 여부를 판단하긴 어렵게 돼 승용차가 과거의 옷차림 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승용차를 '제3의 피부'라고 한다.
뫼저의 결론이 재미있다. 그는 "자동차에 대한 비판은 자동차 시스템의 성장과 줄곧 병행될 테지만, 여전히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할 것이다. 문화적 대안 프로그램으로서 '느림의 발견' 역시 자동차에 대한 사랑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자동차(auto-mobile)는 '자율(autonomy)'과 '이동성(mobility)'의 구현이다. 물론 이는 미국인들의 생각이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그 어떤 문제에도 불구하고 자동차가 우리의 신앙이자 종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신앙생활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별개의 문제다.
당신이 누구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느냐면서 무슨 무슨 자동차로 당신을 대변하라고 외치는 것도 좋겠지만, "당신이란 사람은 자동차 이외엔 달리 자신을 표현하고 설명할 길이 없는 그렇고 그런 사람인가?"라는 물음을 왕성하게 제기해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자식 교육도 마찬가지다. 늘 대학입시 결과가 나온 시점과 겹치는 설에 온 가족, 일가친척이 모이면 전국적으로 부모들의 치열한 '자존심 전쟁'이 벌어진다. 이 전쟁에서의 서열은 자식이 들어간 대학의 간판 값과 정확히 정비례한다. 학부모들은 정말 자식만을 위해서 명문대에 집착하는가? 그렇진 않다. "내가 창피해서 못 살아"라고 외치는 학부모들이 많은 걸 보면, 실은 자식교육을 빙자한 자신의 '인정투쟁'을 하는 셈이다. 설은 그런 '인정투쟁'의 축제이기도 하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