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말청초의 서예가 왕탁(1592~1652)은 자가 각사(覺斯), 호는 치암(痴庵)·숭초(嵩樵)이며, 하남성 맹진(孟津) 출신이기 때문에 왕맹진(王孟津)이라 불렸다. 명나라 천계(天啓) 2년에 진사로 급제하여 남경예부상서와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를 지냈으나, 청이 남경(南京)을 점령하자 항복하여 순치(順治) 연간에 예부상서를 제수받고 「명사(明史)」 편찬시 부총재를 맡았다. 이로 인하여 원의 조맹부처럼 실절(失節)했다는 비난이 뒤따랐는데 그것을 의식했는지 남에게 이를 드러내며 웃는 일이 없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명말청초에 동기창의 서풍이 흥기하여 유행하였고, 청초에 강희제가 그것을 혹애함으로써 일세를 풍미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 뒤를 이어 왕탁이 출현하여 '書不宗晉, 終入野道'의 서예론을 제기하면서 상황이 일변하였다. 명말이라는 시대적 전환기에서 기존의 가치관념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과 새로운 가치에 대한 역설이 동시에 드러나는 발언이다. 조맹부의 복고주의가 제창된 이래 진의 왕희지를 중심으로 한 형사에 치중하다가 명말에 이르러서는 왕서를 존중하면서도 그 정신적인 면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그러한 신개념의 서예론은 진을 종주로 삼지 않고 마침내 야도(野道)로 들어가기에 이른다. 이전에 유려한 면모를 보이던 서풍은 일변하여 보다 본질적이고 숨김없는 야성적 글씨로 전이되었고, 이로써 서가들의 개성적인 면모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법(法)의 차원에서 예(藝)의 차원으로 전개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더불어 청초에 문자학과 금석학이라는 학적 기풍이 흥기함에 따라 서예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전개양상을 보였다.
명말청초의 개성적인 서법가로 꼽히는 왕탁 역시 신필왕탁(神筆王鐸), 오백년래무차군(五百年來無此君)이라는 후세의 명예로운 칭호가 있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행초서 중에서도 특히 초서에 뛰어났다. 행초서 대부분이 자유분방한 결구와 장법을 토대로 구속됨이 없는 운필과 구성을 이루어낸다. 이로써 청대에 분기한 비학과 첩학을 한 곳에서 용해시킨 인물로 평가되며, 일기가성의 소쇄한 운필은 거침없는 기세로 장관을 연출한다. 뿐만 아니라 석묵(惜墨)하지 않고 임리한 묵훈(墨暈)을 이루어 일필휘지의 과감성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임산지(林散之)는 왕탁의 이러한 면을 "自唐懷素後第一人"이라 높이 평가하였다. 법칙적인 면모보다 예술가적 기질이 농후함을 일깨우는 평어로 왕탁의 서예사적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왕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청나라 건륭제의 칙명으로 편찬한 「사고전서(四庫全書)」 이신전(貳臣傳)에 보인다.
여기에 소개하는 '자작오율'은 말 그대로 자신이 지은 오언율시를 흥을 실어 쓴 것이다. 임리한 발묵과 얽매임이 없는 자유분방한 운필이 묵훈을 이루고, 기이한 결구와 공간분할이 신기(新奇)를 자아낸다. 방원(方圓)이 곡절하고 억양돈좌하며 전변하는 필획에서 그의 복잡한 정감과 분개, 비애 등 다층적인 심미적 가치를 느낄 수 있다. 그의 서품을 보노라면 문득 그가 "萬事不如杯在手"(만사가 손에 든 잔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라고 한 말이 떠오른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이미지캡션> 王鐸, 自作五律 (39세작) 이미지캡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