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대] 옛 어진(御眞) 발굴 - 조상진

조상진 논설위원

조선시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은 살아있는 임금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평시엔 진전(眞殿)에 소중히 모셔졌고 외적이 침입해 오면 피란을 떠나야 했다. 조선 왕조가 격동의 세월을 보낸만큼 어진도 풍상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태조 어진(보물 제931호)이 대표적이다.

 

당초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는 전신상과 반신상, 승마상 등 26축이 그려졌다. 이를 전국 6곳의 진전에 봉안했다. 고향인 함경도 함흥을 비롯 이씨의 본향인 전주, 태조가 머물던 개성, 그리고 경복궁과 평양 경주 등이다.

 

이들 어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며 전주 경기전과 함흥 영흥전 것을 제외하고 모두 없어졌다. 지금은 경기전 것이 유일하다.

 

경기전 어진은 태조가 승하한 이듬해 경주본을 모사해 1410년 봉안한 것이다. 딱 600년이 되었다. 현재 어진은 1872년(고종 2년) 화가 조중묵으로 하여금 낡은 원본을 그대로 옮겨 그리게 한 것이다. 어깨와 앞가슴에 황룡을 수놓은 청포(靑袍)를 입고 용상에 정면을 바라보며 앉은 모습이다.

 

이모(移模·남의 글씨나 그림을 본떠 쓰거나 그리는 것) 때는 그야말로 사진찍듯 똑같이 그려야 했다. 즉 '터럭 하나라도 닮지 않으면 곧 다른 사람(一毫不似 便是他人)'이라는 극도의 사실성에 입각했다.

 

그리고 낡은 원본은 항아리에 넣어 땅에 묻었다. 이러한 과정이 세초(洗草)와 매안(埋安)이다.

 

그런데 어진 구본 발굴을 둘러싸고 논란이 적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어진이모도감의궤(御眞移模都監儀軌)'등에 따르면 "고종 9년에 태조어진을 옮겨 그린 뒤 낡은 어진을 백자 항아리에 담아 경기전 북편에 묻었다"고 나와 있다. 전주시는 이를 근거로 문화재청에 두차례 발굴을 신청했다. 하지만 2007년에 이어 올해도 불허되었다. 문화재 사적분과위원 12명이 투표한 결과 찬성 4, 반대 5, 기권 3명이었다.

 

'유물이 발굴되면 역사적 가치가 클 것'이라는 의견 보다 '신성시 하고자 매장한 것을 파헤치는 것은 옳지 않다'는데 손을 들어준 것이다.

 

전주시와 이를 추진한 측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발굴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신비감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토리텔링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싶다.

 

/조상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