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가 다른 소리꾼, 특히 임방울에 비해 훨씬 늦은 나이에 판소리 수업에 뛰어들었다는 얘기는 지난 주에 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항간에 알려진 대로 김연수는 중동중학을 졸업하고 집에서 축음기를 들으며 지내다가 유성준을 찾아가 판소리 <수궁가> 를 배운 것일까? 수궁가>
다행히도 최근 목포대학의 이경엽 교수가 김연수에 관한 상세한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그 얘기를 들어보자. 거금도 노인들은 김연수가 유성준에게 판소리 공부를 하기 전에 어전리 평지마을에 사는 선참봉 집에 머물며 친구인 모희상과 함께 소리 공부를 했다고 한다. 선참봉의 이름은 선낙훈인데, 금산면에서 알아주는 부자였고, 육지에도 전답이 있어 수백 석을 추수했다고 한다. 김연수는 이렇듯 부자인 선참봉의 행랑채에서 선참봉의 후원을 받으며 지방 소리꾼에게 소리를 배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마 이것이 김연수의 최초의 판소리 수업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판소리 공부를 미리 해두었기 때문에 유성준과 같은 대가에게 가서 <수궁가> 를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수궁가>
다음으로는 고흥 출신 명고수로 유명한 오성삼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다는 증언이 있다. 오성삼은 고흥 신청의 대방이었다고 한다. 신청은 관청에 딸린 무당 가계의 남자들로 이루어진 조직이다. 무당 가계의 남자들을 무부(巫夫)라고 하는데, 이들이 무당들의 관할 구역인 당골판의 소유주가 되고, 이들이 또 굿에서 음악을 연주하거나, 각종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았다. 요새로 말하면 이들이 전통시대의 연예인들이었다. 그러기에 이들은 관청에 딸린 조직에 속해 있으면서 관청의 행사에 늘 동원되기도 했다. 대방은 이들 조직의 최고 우두머리를 가리킨다. 오성삼은 북만 잘 쳤던 게 아니고, 해금, 대금, 피리 등 여러 악기에도 능했고, 줄풍류와 삼현육각에도 정통했다고 한다. 오성삼은 낙안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가야금병창의 최고 명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오태석의 당숙이기도 하다. 오성삼은 일제강점기에 고흥읍과 녹동읍에 술집과 국악학습소를 만들어 운영했는데, 김연수는 친구 노희상과 함께 녹동에 나와 판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오성삼의 제자로는 여러 사람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김윤길과 김원길은 김연수의 처남이며, 송이종은 북 솜씨가 뛰어나 김연수의 지정고수 노릇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연수는 오성삼이라는 같은 무계 인물을 통해 판소리를 배우기도 하고, 또 유성준이라는 대가를 소개받아 본격적인 판소리 창자로서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연수에 대한 오성삼의 영향을 살펴볼 수 있는 예로는 김연수의 진양조 이론을 들 수 있다. 김연수는 오성삼의 이론이라면서 진양조는 24박으로 되어 있고, 기(起)·경(景)·결(結)·해(解)의 네 각(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김연수는 이에 따라 자신의 진양조는 반드시 24박으로 짰다. 이는 보성소리의 진양조 6박설과는 다른 주장이다.
또 김연수는 엇중머리 장단을 설명하면서 "굿거리 장단 속에 대노리라는 장단이 있는데, 옛날 대명고수 오성삼 씨의 말씀에 의하여 이것을 엇중머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엇중머리'라는 장단의 이름을 오성삼이 붙였는데 김연수도 그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김연수가 오성삼의 이론의 계승자임을 자신의 입으로 밝히고 있음이 분명하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김연수 자신이 판소리를 배웠다고 한 기간은 2년여에 불과하다. 그것도 스물아홉이라는 아주 늦은 나이에 시작했다. 그러고도 곧 우리나라 판소리계의 중요한 인물로 성장하였다. 그러한 배경에는 김연수 자신이 밝히지 않은 이러한 선행학습이 있었던 것이다.
/최동현(군산대 국어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