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노', 사극의 새 역사를 쓰다

왕도, 영웅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요녀도 없었다.

 

역사에 한 줄 기록되기도 어려운 노비와 그를 쫓는 추노꾼이 주인공이었다. 높은곳, 궁궐을 향하던 카메라는 저잣거리에 눈높이를 맞췄고, 비단 자락 스치는 소리 대신 생존을 위한 땀내음이 진동했다.

 

KBS 2TV '추노'가 25일 막을 내린다.

 

왕조중심의 사극에서 탈피, 그동안 사극의 변방에 머물던 노비와 추노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드라마는 사극의 관습을 보란 듯이 깨부수며 지난 3개월간 질주했다. 1월6일 첫회에서 단숨에 시청률 20%를 넘어선 '추노'는 4회 만에 시청률 30%를 돌파하면서 사극의 새 역사를 썼다.

 

▲노비, 그리고 노비를 쫓는 추노꾼

 

노비는 한마디로 평생 '찍소리' 한번 못 내고 사는 계급이다.

 

그런데 '추노'는 바로 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이들의 주위에는 노비보다 약간 처지가 좋은 저잣거리 양민들과 도망간 노비를 쫓는 추노꾼들이 있다. 하지만 양반으로부터 천하다며 괄시받는 것은 매한가지. 특히 추노꾼은 비열하고 악랄하다는 점에서 툭하면 '개잡놈'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추노'는 바로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브라운관에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조선 인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지만, 그 어떤 현대극보다도 신선한 느낌을 준 것은 그 때문.

 

'추노'의 천성일 작가는 "승자의 역사를 기록한 궁중사극은 안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며 "조선시대 많은 계층이 살고 있었는데 노비를 다루면 어떨까 싶었다. 처음에는 불안했다. 소재가 워낙 특이해 시청자들이 받아들일까 싶었다"고 말했다.

 

이 특이한 드라마에 시청자들은 즉각적으로, 뜨겁게 반응했다. 도중에 멜로가 강조되고, 이야기가 여러 인물에게 분산될 때면 재미와 긴장감이 다소 떨어지기도 했지만 드라마는 시청률 30% 대를 유지하며 꾸준히 관심을 모았다.

 

▲시대에 순응 못 한 자들의 이야기

 

'추노'는 시대에 순응하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다. 반상의 구분이 없는 평등한 사회, 노비도 자기 목소리 한번 내보는 사회를 만들자는 게 주인공들의 바람이다.

 

노비당을 이끄는 '그분'(박기웅)은 "우리도 죽기 전에 큰소리 내보자"고 하고, 노비 언년(이다해)은 양반댁 도령 대길(장혁)에 이어 무관 태하(오지호)를 사랑한다. 그런 언년에게 가장 무서운 말은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태하(오지호)는 살기 좋은 세상을 꿈꾸며 죽은 소현세자에게 충성을 다한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 혜원이 실은 노비 언년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괴로워하지만, 이내 그것을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천 작가는 "조선시대에는 사랑에 제약이 많았다. 사람 간의 사랑을 제약하는 사회는 좋지 않다"며 "'추노'는 그런 사회에 온몸을 던진 자들의 이야기다. 시대에 순응하지 못한 사랑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는 "관용이 없었던 시대에 저항한 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시대에도 변화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획했다"고 덧붙였다.

 

'추노'는 대사에서도 일반 사극의 관습을 거부했다. 외화도 아닌데 '추노'에는 양반들의 대화에 자막이 등장했고, 서민들의 대화에는 속담이 줄줄이 사용됐다. 또 저잣거리 남자들은 손윗사람을 '언니'라 부르는 등 대사도 특이했다.

 

천 작가는 "그 당시 양반들은 '문자'를 많이 썼을 거고 그 말을 노비들은 못 알아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양반들의 대사를 마치 외국어처럼 한자어 위주로 처리했다"고 말했다.

 

▲'조선판 매트릭스'..액션신의 진화

 

'추노'는 소재, 스토리 못지않게 빼어난 액션신으로 화제를 모았다. 태하와 대길의 갈대밭 대결신, 태하와 철웅의 제주도 대결신, 대길 패거리와 철웅의 기와집 마당 대결신 등은 탄성을 자아낼 만큼 수려했다.

 

기본적으로 발품을 많이 팔아 찾아낸 촬영지의 풍광이 아름다웠고, 거기에 액션으로 단련된 장혁과 이종혁, 오지호 등의 몸동작이 잘 어우러졌으며 슬로 모션을 적절히 사용한 연출이 가세해 기존 사극에서는 보기 힘든 근사한 액션신이 이어졌다.

 

또한 기와집과 초가집의 색감은 물론이고 자연의 질감도 선명하게 잡아내는, 레드원 카메라로 찍은 고화질 영상이 감상의 재미를 배가했다.

 

네티즌들은 물방울 하나, 칼의 스침 하나를 잡아내는 '추노'의 액션신에 대해 주인공이 총알을 피하는 슬로 모션이 인상적이었던 영화 '매트릭스'에 빗대 '조선판 매트릭스'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장혁의 재발견..배우들의 고른 호연

 

'추노'를 통해 장혁은 재발견됐다. 그는 이 드라마를 통해 연기파 배우의 문에 들어섰다. '잘생긴 배우'라는 꺼풀을 벗어던지고, '폼 잡는 연기'라는 지적에서 벗어나 진짜 배우로 거듭났다는 평을 받았다. 양반에서 추노꾼으로 전락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10년간 찾아 헤매다 결국 찾지만 잡지 못하는 자의 기막힌 인생을 그는 자연스럽게 소화했다.

 

장혁은 지난 19일 '추노'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이 작품을 통해 연기의 밸런스를 잡을 수 있게 돼 고맙고 너무나 행복했다"고 말했다.

 

이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남자배우가 남자로서 가장 짙은 향을 낼 수 있는 시기가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시기의 포문을 열며 접한 캐릭터가 '추노'의 대길이었다"며 "첫 사랑을 기억하는 것처럼 이 캐릭터는 앞으로 아주 의미있게 남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 외에 천지호 역의 성동일과 황철웅 역의 이종혁을 비롯해 김지석, 이한위, 윤문식, 안석환 등의 펄떡펄떡 뛰는 연기는 드라마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다만 여주인공 이다해가 수동적인 캐릭터 탓에 '민폐 언년'이라는 지적을 받으며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천 작가는 "언년이는 극이 끝나야 완성되는 캐릭터로 계속해서 변화 발전하게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