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서울 광장에서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그분의 평화사상과 순국정신을 기리는 다양한 추모행사가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인품은 뜻있는 일본인들게도 흠모의 대상이 된지 오래이다. 그분이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것은 개인 감정의 발로가 아니라 동양평화를 위해서였다는 대의명분이나 아시아 공동화폐 발행과 아시아 개발은행 설립을 역설했다는것은 그분의 동양 평화론이 상당히 구체성을 띠었음을 증명한다.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숨을 거둔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는 어떤 인물인가.일본은 우리처럼 에도막부 250년동안 외국과의 교섭을 인정치않는 쇄국정책을 시행해왔다.그러나 1853년 미국의 흑선(黑船) 4척이 일본 우라가 앞바다에 정착하면서 일본의 역사는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이 내전(內戰)에 가까운 분란을 겪으면서 천황을 중심으로 서구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존왕파가 승리를 거둔다
.이를 두고 1868년의 메이지 유신이라고 한다. 메이지 유신의 주체는 지금 일본의 규수지방의 조슈번(長州藩)과 사쓰마번(?摩藩)의 무사들이다. 그중에서도 최고 지도자로 손꼽히는 유신삼걸(維新三傑)은 죠수번과 사쓰마번 출신의 '사이고 다카모리''오쿠보 도시미치''기도 다카요시'이다. 이토는 '기도 다카요시'계열로써 출발했다.
'기도 다카요시'는 조선을 정복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이토의 학력은 '요시다 쇼닌'의 문하에서 잠깐 공부하고 이십대 초반에 영국에서 1년 남짓 유학하며 어깨너머로 배운것이 전부인 사람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두뇌는 명석하여 격변의 일본정세를 타고 메이지 정부에서 총리대신을 세 번이나 한 인물이다. 그가 하얼빈을 방문한 목적은 개인적인 여행이라고 했지만 러시아측과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그 당시 러시아와 일본이 만주철도를 양분하고 있었는데 미국은 만주철도를 중립화하여 각국의 나라가 공동으로 경영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토의 만주여행도 이를 해결하기위한 대처 방안이라고 하기도 한다. 일본에게는 이토가 있었으면 우리에게는 안중근 의사가 있었던 것이다.
/장세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