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동계 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땄을 때 그 부대 효과가 물경 20조원에 달한다고 보도되자 일부에선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국민적 환희를 그대로 누리면 그만이지 순수한 올림픽 메달을 굳이 돈으로 환산해야만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며칠 전의 세계대회에서는 첫 날 7위로 내려앉는 등 기대에 부응치 못했는데 이런 경우에는 원가 손실을 어느정도로 산정해야 하는 것인지? 이처럼 우리는 매사 경제논리에 이끌려 왔다.
이는 지난 70년대 초 외국기자 한 사람이 신라 금관을 감상하면서 도대체 경주일대에 매장된 금이 몇 파운드나 될까를 유추했던 경우와 다를 바가 없다. 당시 신라인들이 불국사를 창건하고 석굴암을 조각했던 것은 도저한 불심과 장인정신, 즉 예술혼의 발로에서였지 뒷날 경주일대의 엄청난 관광수익을 위해서였겠는가? 그 기자는 '가격'과 '가치'를 혼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병인양요(1866)때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에서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은 인정하나 반환은 할 수 없다'는 전통 있는 국가로서의 체통을 잃으면서까지 버티고 있는 이면을 짚어보아야 한다. 고대 이집트의 유물과는 또 다르다. 이 도서는 자국민들이 고려청자처럼 시각적으로 즐길 가치도 없거니와 읽지도 못한다. 설혹 독해력이 있다 해도 그들의 헌 서점에 널려있는 소설만치도 재미가 없다. 6?25 때 UN군으로 참전하여 적잖은 희생을 감수한 우방임에도 이 무례한 버팀이 한없이 야속하지만 그 배면에 깔린 문화주의, 인문주의에의 집착력만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널리 알려진 '아라비안 나이트'(일명,천일야화)를 기억할 것이다. 옛날 아내의 부정에 크게 진노한 왕이 여자의 정절을 믿지 않게 되자, 하루를 같이 지낸 처녀의 정절을 영구 보존키 위해 그녀를 죽이는 기벽을 갖게 된다. 급기야는 처녀들이 모두 죽거나 도망가게 되자 왕이 같이 잔 처녀를 죽이는 일을 맡고 있던 대신의 딸이 자진해서 왕에게 나아가 이야기로, 못된 왕의 노여움을 풀려 한다. 그가 바로 샤라자드이다. 그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계속함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유예시켜 나간다. 샤라자드가 이야기로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녀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호기심의 실체를 예리하게 간파한 데서 연유한다.
이윽고 왕에게 가기로 한 날짜가 정해지자 명민한 샤라자드는 그동안 자신이 열심히 읽어놓은 선왕에 대한 일화와 전설, 시문, 그리고 동서고금의 역사, 철학 등의 명저를 다시금 되새기며 평소의 지식과 교양을 동원하여 왕의 마음을 사로 잡으려 한다. 만일 이야기가 재미없어 왕이 그 다음을 들으려하지 않을 때에 그녀의 삶은 끝장이 난다. 이윽고 목숨을 건 그녀의 이야기를 왕이 계속 즐겁게 들음으로써 그녀는 죽음을 면하게 된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녀가 밤새도록 끌고 간 이야기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이야기가 아니라 책에서 읽었거나 남에게서 익힌 이야기였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가 눈에 보이는 값진 장식이나 요염한 애교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했다면 필시 그는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지금 이 시대는 당시의 샤라자드처럼 목숨을 건 이야기꾼도 드물거니와 아예 그런 무미건조한 이야기를 들으려는 대상도 없다. 차라리 이야기보다는 요염한 자태나 뇌쇄(惱殺)스런 애교라야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을지도 모른다. 이제 더 이상 정치나, 경제논리 속에 인문주의가 짓눌려서는 안된다. 궁극적으로 세계역사는 다소 완만할지라도 문화, 인문주의의 수레가 끌고 있다. 그 저변엔 언제나 인류의 본원적인 휴머니즘이 두 팔을 벌리고 있기 때문이다.
/허소라(시인·군산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