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사람] 전주 찾은 서울시향 상임 작곡가 진은숙씨

"맛의 고장 전주, 꿀맛같은 휴식 보내는데 최고"…6년전 '작곡 노벨상' 그라베마이어상 수상

지난해 영국 최고 음악제인 BBC 프롬스(Proms)에서 첼로 협주곡을 초연했고, 미국과 일본에서는 생황 협주곡으로 첫 선을 보였다. 지난 2006년부터 서울시향의 현대 음악 시리즈 '아르스 노바(새로운 예술)'를 기획하고 진행해온 진은숙(49·서울시향 상임작곡가)씨는 세계에서 가장 바쁜 작곡가다. "순전히 맛 때문에 전주 한옥마을로 휴가를 왔다"는 그는 간만의 나들이로 여유를 찾은 듯 보였다. 이종민 전북대 교수의 안내로 한옥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본 그는 느림의 미학에 빠지고 있었다.

 

2004년'작곡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그라베마이어상을 수상한 그는 130년 역사의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 개막 공연에서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초연해 세계적으로 대대적인 호평을 받았다. 보수적인 독일 음악계에서 우뚝 선 그의 성공은 값진 것이었다.

 

그가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이끌어준 인연은 강석희, 고(故) 죄르지 리게티, 켄트 나가노. 강석희는 그를 발굴한 한국의 은사라면, 리게티는 그를 키운 함부르크의 스승, 나가노는 그를 세계에 알린 음악감독이자 지휘자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그에게 위촉한 것도 로스앤젤레스 오페라 음악 감독이었던 나가노였다.

 

"작곡할 때마다 매번 지옥에 갔다오는 듯한 고통을 느껴서인지 작곡이 너무 좋다고 여긴 적은 없어요. 리게티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쓰라고 닦달하셨죠. 하도 괴로워서 보드카를 잔뜩 마시고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날 공원에서 얼어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상상한 적도 있었습니다. 집안 형편 때문에 포기한 피아니스트가 됐다면 더 행복했을 지도 모르죠.(웃음)"

 

그의 곡은 유럽 작곡가보다 더 유럽적이라는 평도 있다. 지난해 발표한 생황 협주곡은 동양의 악기를 사용한 첫 작품이다.

 

"한국은 민족주의적인 경향이 높은 것 같아요. 제가 한국적인 것을 작품에 녹였다고 선전하면 오히려 성공하기가 더 쉬울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작곡가의 본질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베토벤 곡만 해도 독일 음악에 갇혀 있지 않고, 전 세계인이 감상하는 곡이잖아요."

 

판소리 공연을 들어봤느냐고 물으니 "전주하면 소리 아니냐"며 "제대로 들어보진 못했지만, 관심이 있다"고 했다. 상투성을 거부하고 새로움을 위해 도전하는 프로다운 모습이었다.

 

"반드시 대중적인 예술이 좋다는 등식엔 찬성할 수 없습니다. '아르스 노바'를 진행하면서 흥행 부진에 시달릴 때면, 예술이 진정한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때때로 시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말을 절감해요. 이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싸우고, 나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작곡가는 착하기만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예요. 마음 속에 괴물이 하나씩은 들어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