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발생 50주년을 맞아 마산에서 고 김주열 열사 범국민장 장례위원회와 추모사업회가 지난 11일 마산 중앙 부두에서 범국민장을 치뤘다. 이날 운구 행렬은 3.15의거 탑에서 노제에 앞서 고 김주열 열사의 큰 누나 김영자(74세)를 비롯 유족 16명은 50년전 김열사의 시신이 떠올랐던 바닷가 현장에서 기도를 시작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 날 함세웅 민주화 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조사를 통해 김주열 열사의 희생과 3.15의거 그리고 4.19 민주혁명은 5.16 군사반란과 그 잔재 세력을 청산함으로서 그 참된 정신을 실현할 수 있다. 이것이 김주열 열사 범국민장을 거행하는 목적이라 강조했다. 이때본 행사에 참석한 유족은 물론 참석자 모두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김열사는 1944년 10월 7일 아버지 김재계씨와 어머니 권찬주 여사의 슬하에서 3남 2녀중 둘째로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할아버지는 면장을 지낸 덕망가로 마을에서 부유층에 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환으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하고 1956년 당시 남원농업고등학교 입학 후 1학기를 마치기 전 중퇴하였다고 한다. 그는 기울어진 가세를 세우기 위해 은행원이 되기위해 1960년 마산고등학교에 응시해 합격자 발표를 확인키 위해 이모할머니집에 머물렀다. 당시 3월 14일로 예정되었던 합격자 발표가 16일로 연기되면서 그의 운명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3.15 부정선거에 항거한 마산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때 김열사는 친형과 함께 시위대에 동참했었다고 한다. 이날밤 10시경 김열사는 경찰이 쏜 최류탄에 얼굴을 맞고 쓰러졌다. 경찰은 이를 감추기 위해 시신을 돌덩이에 묶어 바다에 던진 뒤 27일 동안 행방불명되었다가 시신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떠올랐다. 이를 발견한 어부가 인근부둣가 모다방으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고 당시 부산일보 마산주재 기자인 허 종 기자가 카메라를 숨기고 현장으로 달려가 얼굴에 최류탄이 박힌 김열사의 퉁퉁부은 얼굴을 촬영한 한 장의 사진으로 시민들은 큰 충격을 받고 이로 인해 마산에서는 제2의 마산의거가 발발되어 인근 지역 부산, 대구 주변도시 아니 전국으로 확산되어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벌어졌다. 결국 이로인해 4.19 혁명까지 이어져 이승만 정권 자유당의 몰락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날 동행사에 참석한 자들의 말에 의하면 유족들은 '해마다 이맘때면 많은 분들이 주열이에 대해 묻는데... 너무나도 괴로웠다, 대답하기도 싫었고 기억하기 조차 싫었다. 하지만 50년이 지났다. 주열이 말고도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음에도 이렇게 주열이를 위해 행사를 마련해주신 관련 단체와 시민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주열이의 죽음에 대해서는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주열이가 마산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밤을 주열이는 큰 누나와 함께 같이 지새우면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최근 이곳 남원에서도 고 김주열 열사의 각종 추모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생가복원에 이어 묘역 정비를 끝내고 오는 4.19 오전 11시에 현장에서 추모행사가 거행될 예정이다.
/이병채(남원문화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