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 사업은 계획단계에서부터 많은 정권이 거쳐갔다. 그리고 그 정권이 바뀔 때마다 크고 작은 변화를 겪었다.
새만금 사업은 1970년대초 박정희 대통령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안정적 식량확보가 중요했던 1971년 당시 옥구군과 충남 서천군을 연결하는 '옥서지구 농업개발사업계획'이 수립됐다. 1단계(5만4000㏊)와 2단계(4만7000㏊)로 나뉘어 수립된 이 계획에서 1단계는 IBRD차관 도입으로 논산·금강지구 사업이 추진됐다. 김제·부안·옥구지구를 묶은 2단계가 현재의 새만금 지구이다.
그러나 2단계 사업은 당시에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 전두환 대통령때인 1986년 김제지구 간척지 농업개발사업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본격 검토됐다. 부안군 계화도와 옥구군 선연리를 연결하는 9.6㎞ 방조제 축조 계획으로, 김제 만경과 진봉·광활·죽산면 일대의 관개배수 개선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어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87년에는 확대됐다. 그해 11월 정인용 부총리 주재로 열린 관계 장관 회의에서 황인성 농림부장관이 처음으로 '새만금간척사업'이란 이름을 공식 사용했다. 여러 해석이 있지만, 현재는 만경·김제평와 같은 옥토를 새로 일궈 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게 공식 해석이다.
그해 12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민정당 대선 후보는 새만금 사업을 선거공약으로 발표했다. 노 대통령은 당선 된 후 1989년 새만금종합개발사업 기본계획을 발표하고, 1991년에 새만금 현지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국비확보의 어려움으로 지지부진했다. 같은 시기에 첫삽을 뜬 중국 상해 푸동지구가 매립공사를 일찌감치 마무리, 하루가 멀다하고 고층빌딩이 속속 들어서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새만금은 예산부족으로 제자리 걸음이었다.
이어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커다란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1999년 유종근 당시 도지사가 민관공동조사를 수용하면서 2년간 공사가 중단되어 허송세월을 보냈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때는 환경·시민사회단체의 반발로 기나긴 소송에 휘말렸다.
2001년 환경운동연합의 헌법소원으로 시작된 새만금 관련 소송은 2006년 3월 대법원 확정판결때까지 5년간 지속됐다. 참여정부 말기인 2007년 12월 새만금 특별법이 제정된게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이후 이명박 대통령이 인수위 시절에 새만금을 '동북아 경제중심지'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탄력이 붙었다. 새만금 경제자유구역 지정과 내부토지개발 기본구상, 새만금 위원회 발족, 새만금종합실천계획안 최종 확정 등 최근 2년 동안에 새만금 비로소 제 속도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