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후 2시30분 삼백집에서 영화감독 배창호(57)가 아홉명의 팬들과 만났다. 늦은 점심. 게다가 이렇게 뜨거운 날씨에 콩나물국밥이라니…. 하지만 그는 "어제 술을 마셔서 좋다"며 "전주에 콩나물국밥이 유명한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상당히 오랜만이에요. 요즘 영화를 보면 사람을 보는 시각이 부정적인 요소들이 많아요. 비열하고 열등하고 폭력적이고 나아가 엽기적이고…. 흥행 때문에 웃음을 꾸미려면 어쩔 수 없지만 덩달아 영화도 경박하고 천박한 경우가 있지요. 나는 인간 원형에 대한 믿음이 있는데…. 이런 내가 현대적인 영화를 찍으면 시대와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는 생각도 들었었지요."
쉬는 동안 대학 영화과 교수로 몇 년 있었다. 스무살 젊은이들과 만나며 21세기 속에서도 옛날의 순수함이 살아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세상이, 인간이 저렇다고 해도 젊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2010 전주국제영화제' 중 '한국영화 쇼케이스'에서 상영된 배감독의 새영화 <여행> 은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3부작 옴니버스 영화다. 입대를 앞둔 남학생과 미국 연수를 준비 중인 여학생이 사랑과 우정 사이를 오가며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소녀는 오래 전 집을 나간 엄마를 미워하지만 그리워한다. 남편과 아이 보살피기에 지친 중년의 주부는 홀로 제주도 여행을 감행한다. 세번째 에피소드의 중년 주부는 배감독의 아내 김유미씨. 이번 전주로의 여행에도 동행했다. 여행>
"첫번째 에피소드는 제자들에게 상황을 주고 시나리오를 같이 썼어요. 내가 내면이나 본질은 알지만, 대사까지 구체적으로 쓰기에는 젊은이들의 생각을 잘 모르니까요. 두번째 에피소드는 다른 섬에 갔다가 섬이 답답해 탈출한 한 며느리의 이야기를 듣고 쓴 건데, 중학생 딸 아이를 데리고 대사를 썼어요. 세번째는 우리 집사람과 같이 썼는데, 체험할 수 없다면 나를 낮춰서 이해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 편의 에피소드는 다 길로 끝이 난다. 감독은 "쉽게 인생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길"이라며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과 방법이 다 길"이라고 말했다. 극적인 사건이나 멋을 부린 명대사는 없어도 지루하지 않은 영화. "별로 지루하지 않았나요?"라고 감독이 물었다. 한숟가락 국밥을 뜨던 한 팬이 "그래서 저는 올해 제주도 가려고요!"라고 답했다.
"좋은 영화는 정서에 주는 음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공적인 영화를 보면 식욕을 잃고 나오는데, 삶을 잘 다룬 영화를 보면 식욕이 돋아나죠. 아, 국밥 토크는 이번이 처음인가요? 한정식 토크를 한 번 해보시지…. 허허. 국밥이 서민음식 중 하나인데, 더 전주적인 것 같습니다."
그는 "게스트와의 만남(GV)은 딱딱한 분위기가 연출될 수 밖에 없는데, 국밥 토크는 맛은 다 못 느껴도 편안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내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과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전주영화제에 오기 위해 이틀이나 회사에 휴가를 냈다"는 양유정씨(29·대전)는 "평소 보고 싶은 감독을 직접 보니 떨리고 설레인다"며 즐거워했다. <고래사냥> 때부터 팬이었다는 이동화씨(47·전주)는 "감독님을 직접 만나니 소탈하고 좋은 분 같다"며 "감독님의 영화들과 이미지가 통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고래사냥>
"지금은 다 사라진 거 같은데, 80년대 오다가다 보면 전주에 다방이 많았어요. 허름한 다방에 가도 동양화나 글씨가 있는 걸 보고, 아, 이래서 예향 예향 하는가 보다 했죠. 그 때는 백반에 반찬도 많이 줬었는데…."
그는 "전주천이 고요하게 흐르는 전주는 음식 가지수도 많지만, 여러가지로 넉넉하고 풍요로운 곳 같다"고 했다. 올해 '경쟁부문' 중 '국제경쟁' 심사위원도 맡고 있는 그는 "의외로 아직도 저렇게 영화를 만드는구나 할 정도로 고전적인 영화도 있어 반가웠다"며 "여러 나라의 특색있는 영화를 볼 수 있어 좋다"고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