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하라, 바꿔라, 고쳐라…. 이런 영화들만 틀면서 현실에서는 조화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성격인 걸 보면 모순이었죠. (웃음) 제 인생에서 가장 좋은 10년을 전주에서 보냈어요. 힘든 일도 있고 혼자 가지고 있는 아픔도 있지만 좋은 기억들만 가지고 가고 싶습니다."
'2010 전주국제영화제'를 끝으로 전주영화제를 떠나는 정수완 수석 프로그래머(47·동국대 교수). 그는 원래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낯가림도 심해 새로운 영화를 만나는 건 즐거웠지만, 새로운 감독을 만나는 건 힘이 들었다. 그래도 10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모범생 컴플렉스' 덕분. 영화제가 성장한 만큼 스스로도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의 고향은 서울. 2000년 1회 영화제 때 일본 영화 코디네이터로 전주와 연을 맺었다. 3회 때는 일본 유학으로 잠시 쉬었지만, 4회 때 정식으로 프로그래머가 됐으며 8회 때 수석 프로그래머로 올라섰다. 전주를 처음 방문한 날, 톨게이트의 '전주' 현판을 보고서는 신비로운 곳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전주천변의 유채꽃이 예뻤고, 노을 지는 한옥마을이 편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10년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는 "10년이 참 빨리 갔다"고 했다.
"프로그래머가 되서 외국 영화제에 처음 나갔는데, 사실 반응이 좋지 않았어요. 프로그래머가 계속 바뀌는 영화제에 대해 신뢰가 있을 수가 없었겠죠. 그래도 열심히 뛰어다니면 될 줄 알았어요."
4회 영화제를 마치고 김은희 프로그래머가 손을 뗐다. 그 역시 그만 두고 싶었지만, 자신마저 포기하면 전주영화제는 다시 일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기서 깬다면 정말 흔들릴 것 같았어요. 그래서 유운성 프로그래머를 영입했죠. 영화제를 일으키는 데 있어 객관적인 눈이 필요했고, 젊고 고집있는 유 프로는 정말 영화를 좋아하는 아이였거든요. 지식이나 정보 면에서 많은 걸 가지고 있었죠."
또하나 운이 좋았던 것은 임안자 전 부집행위원장이었다. 그는 "4회 때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던 전주영화제에 임안자 선생님의 경험과 인맥은 큰 도움이 됐다"며 "선생님과 해외에 가서 정말 발이 닳도록 뛰어다녔다"고 말했다.
"선생님하고 우리 10회까지만 하고 멋있게 떠나자는 이야기를 많이 했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갑자기 쓰러지시면서 영화제를 그만 둘 수 밖에 없는 상황이셨죠. 두 사람이 한꺼번에 그만 두기에는 문제가 생길 소지가 많았고, 11회에 꼭 그만 둬야겠다고 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이라면 조금 편안하게 갈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는 두가지 일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고 했다. 학교에 가면 아이들에게 미안했고, 영화제에 오면 예전만큼 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 하지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에 부쳤다.
"300편 안팎의 영화를 소개하려면 적어도 500편 이상을 봐야돼요. 문득 나 조차도 영화를 소비하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죠. 영화를 보면서 여러가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단순히 이 영화가 우리 영화제에 좋을까 안좋을까만 생각하기에도 바빴거든요."
그는 "아직 전문가가 되지 못했다"며 일본 영화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화여대 영문과와 연세대 국제대학원 일본학과를 졸업하고 우연히 영화를 전공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에 동국대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또래보다 10년 늦게 영화공부를 시작한 만큼 새로운 영역을 찾아야 했고 당시에 개방되지 않았던 일본 영화를 발견했다. 아시아에도 좋은 영화가 있다는 게 놀라웠고, 식민지 시대 발전한 한국영화와도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했다. 그는 일본의 스튜디오 시스템 안에서도 자기 색깔을 분명히 내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을 연구하고 싶다고 했다. 또 전 세계를 순회하며 학회를 열고 있는 일본 영화 학회를 서울로 유치하고 싶다고도 했다.
"전주영화제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떠난 사람들이 안온다는 거죠. 그렇게 끊긴 인연들이 안타까워 10회 때만은 다 초대하고 싶었는데, 이미 골이 깊어져 잘 안됐어요. 전주가 먼저 그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으면 좋겠어요. 결국 씨를 뿌린 건 초창기 사람들이니까요."
그는 "아무리 대단한 사람들이,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가져다 놓는다 하더라도 지역민들이 영화제에 대해 프라이드를 갖지 못한다면 어려웠을 것"이라며 "지역에도 감사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의 그 어떤 영화제보다도 전주가 지역과의 유대가 강한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깐느도 마찬가지고 베니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영화제는 시민이나 관객의 것이죠. 누가 오더라도 열심히 일하고 때가 되면 나가고, 어느 순간 사람들은 다 없어지고 전주영화제라는 큰 덩어리만 남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전주영화제가 10년을 하며 안정된 것만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계속 간다고 했을 때 더 좋아질 것 같진 않다"며 "새로운 방향을 챙겨야할 때"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변화를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그는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이미 전주영화제는 잘 뿌리내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