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아(宰我)가 물었다. "1년이 지나면 새로 추수도 해서 햇곡식도 나오고, 불씨도 바꾸게 마련입니다. 3년이 아니라 1년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공자(孔子)는 말이 없었다. 제자가 나가고 나자 공자는 뒤에다 대고 들으란 듯이 말했다. "재아는 3년 동안 부모 품에 안긴 적이 없었나보군!"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3년 상례(喪禮)를 한다는 공자의 말이 있었든지, 재아는 위와 같이 물었다. 그랬다가, 공자의 극한 분노를 불렀고 (그는 제자의 질문에 이렇게 침묵으로 대응하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그는 무척 언짢았던 거다.), 급기야 재아가 세미나 자리를 나가고 난 뒤에, 그 뒤에다 대고 요즘 말로 하면 '후레자식'이라는 욕설을 퍼붓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일화는 동아시아 최고의 고전 「논어(論語)」에 실렸고, 이후 무려 2500년간 재아에 대한 세인들의 인상을 구겨놓았다.
그러나 이 장면을 잘 헤아려 보면 재아의 질문이 터무니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닌 게 아니라, 1년이면 대체로 수확이 끝나 햇곡이 나오게 마련이고, 캘린더도 바꾸게 된다. 사람들의 시간 구획 정서에 1년은 그만큼 명징하게 다가온다. 그러므로 상례도 이런 자연순환의 메커니즘에 따라 1년으로 하는 게 훨씬 합리적이고 상징성도 있다는 게 재아의 질문이었던 것이다.
그럼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것은 공자의 말에 있다. 3년은 부모 품에서 커야 한다는 너무도 명료한 사실이 그것이다. 공자의 삼년상(만 2년)은 바로 이 생물학적 토대에서 출발했다. 재아가 놓친 것은 이런 자연순환의 일반성과 다른 인간이란 동물의 자연성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이 대화를 전후해 어떤 불쾌한 일이 있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아무리 생각해도 재아가 공자에게서 이런 말까지 들을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 미숙아를 낳았기 때문에
가끔 텔레비전에서 '동물의 왕국'을 보면서 늘 의아했던 일이 있다. 종종 사자의 먹이감이 되는 가젤(소과에 속하는 영양류)은, 새끼가 어미 뱃속에서 나오면 잠시 비척거리다가 거의 10초 안에 걷고, 곧이어 뛴다. 얼마 전 본 영화 '적벽'에서 거꾸로 들어선 망아지를 제갈공명이 바로 돌려 순산시키는 장면이 나왔는데, 거기서도 망아지는 태어나자마자 거의 가젤과 같은 수준으로 '자립'했다.
그러나 인간은 절대 이렇게 못한다. 종종 막 태어난 갓난아기를 보면서 귀엽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난 아직도 그 말이 곧이곧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 큰 놈, 작은 놈이 태어났을 때도 나는 귀엽다는 느낌보다는 징그러웠다. (이런 느낌의 배후에는 내 인격 수준이 있기도 하겠지만.) 나중에 귀여워지기는 했다.
태어난 뒤 3년 이상은 안고 먹이고 싸게 하고 온갖 수발을 다 들어주어야만 인간은 가젤이나 말, 소가 태어나면서 불과 10초 만에 도달하는 운동 능력에 가까스로 도달할 수 있다. 여기서 문명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진화에 필요한 기간은 제외하자. 다만, 그 기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 교육 기간이 늘어나고, 혼인 시기가 늦추어지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정도만 짚고 넘어가자.
▲ 영장(靈長) 신화의 실제
이렇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모 품에 있어야 하고, '그 오랜 보살핌이 보다 영속적인 유대를 이루리라'는 말처럼, 가족이란 것이 생겼다. 그리고 공자의 말은 바로 이런 생물학적 조건을 '삼년상'이라는 제도와 윤리로 표현한 것 뿐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적어도 삼 년은 품안에서 널 키워준 은혜 정도는 생각하는 게 사람답지 않겠느냐는, 이 호소가 그렇게 무리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미심쩍은 인간 중심주의마저도 양해되는 것은 아니다. 태어난 지 10초 만에 뛰지 못한다고 해서 인간이 가젤이나 말보다 못하다고 비하하려는 건 더욱 아니다. 적어도 인간이 진화의 역사에서 도달해야할 정점, 흔히 말하는 만물의 영장은 아니라는 점은 확인해야겠다.
미숙아의 탄생은 직립(直立)에서 연유한다. 직립으로 도구 사용이 가능해졌다고 하지만 그건 전혀 근거가 없다. 직립을 하면서 골반이 작아졌고, 도저히 오랫 동안 자궁에 태아를 담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젤처럼 태어나서 바로 걷기 위해서는 적어도 태아를 자궁에 1년 이상을 더 데리고 있어야 하는데, 지금보다 임신 기간이 1년 이상 늘어날 때 그 태아를 정상적으로 분만할 수 있는 산모가 많지 않다는 게 의학계의 정설이다. 아마 산모 사망률이 대폭 늘어날 것이다. 돌이 지난 애를 낳는다고 생각하면 상상이 쉽다. 그나마 열 달 짜리 태아는 머리뼈가 말랑말랑해서 자궁을 빠져나오기 쉽다. 그러나 22개월 된 태아는 머리뼈가 굳어져서 현재 인간의 골반 수준이라면 이런 아이를 제대로 분만할 수 있는 산모는 열에 한 둘 뿐이다. 간단히 말하면 멸종한다는 뜻이다.
▲ 다시 생각해보는 효(孝)
이상이 생물 진화 일반에서 본 약간 슬픈 인간의 모습이라면, 좀 더 인간적인 수준에서 재아와 공자의 대화는 색다른 슬픔을 담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 공자의 '오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 서운함 말이다. 그건 우리가 흔히 듣는 말, "너도 애 키워 봐라!" 하는 조금 저주의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악의적이지만은 않은 말 속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숙명적으로 부모보다 늦게 태어나게 되어 있다. (설마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분이 있을까?) 그리고 미숙한 상태로 품안에서 적어도 3년 이상을 지낸다. 그러나 머리가 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엄마가 나에게 해준 게 뭐 있어!"하면서 대든다. 그 때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대개, 체념을 섞어서, "너도 애 키워 봐라!" 하신다. 그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자식들은 "또 그 소리!" 하는 마음으로 멀뚱멀뚱 눈알만 굴린다. 짐작이 가지 않는 차원의 일이므로.
그런데 나중에 막상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자신들이 새끼들을 키워보면 그제서야 "아, 그 말이었구나!" 하면서 때늦은 후회로 온다. 그래서 명절 때 차례 지낸 후 유난히 쓸쓸한 햇살을 받으며 그리워하고, 어쩌다 속을 썩이거나 흐뭇하게 만드는 새끼들을 보면 그 분들을 떠올리곤 눈물 짓는다. 이 숙명, 결코 바꿀 수 없다. 그래서 효를 가르쳤던 유가(儒家)의 정조에는 슬픔이 배어있다. 효는 부모를 위한 게 아니라, 자식·새끼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새끼들은 그걸 모른다. 숙명이다. 그러나 가르치기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부모가 돌아가신 뒤 덜 마음이 아플 테니까. 새끼들이….
지난 8일, 어버이날이라고 큰 놈, 작은 놈 모두 카네이션을 만들고, 문자메시지 정도의 세 줄짜리 글을 편지랍시고 내밀었다. 내용 ? 뻔했다. 별로 감동을 주지 못하는. 이 관계의 진실을 알고 있는 나는 약간 슬프면서도 또 조금 뿌듯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 또한 숙명이다.
/ 오항녕(한국고전문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