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요.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확실해야 합니다.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작가가 예술작품을 통해 미적인 아름다움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사회참여를 해야 하는 거에요. 예술가들이 무조건 자기만족을 위해서 '유희성'을 추구하다보면 '나 홀로 예술'이 될 수 있어요. 예술이 사회에 참여하기 위해 관심을 갖고, 또 참여할 때 사회와 문화의 질이 한 단계 올라갈 수 있거든요. 결국 대중에 대한, 예술의 공공성에 대한 작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판화만을 고집해 온 작가. '판화가'란 말이 그 누구보다도 어울렸던 작가. 판화가 지용출이 18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교통사고였고, 그는 작업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1963년 서울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그림하면 굶어죽는다"는 부모님의 뜻을 따라 공고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1989년 6수 끝에 추계예술대학교 판화과에 입학했다. 6수를 할 때에는 큰 누나를 따라 청계천 평화시장의 공장을 다니며 옷 만드는 일을 했다.
대학시절에는 머리에 띠 두르고 주먹 쥐고 있는 판화를 찍어내며 사회변혁운동을 했다. 예술가로서 "진짜 작업은 졸업하고 나면서 부터" 였다.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됐다가 복직된 아내를 따라 1994년 전북으로 내려왔다. 전북에서 처음 만난 미술가는 판화가 유대수. 지씨와 두차례 '2인전'을 열기도 했던 유씨는 "둘 다 힘들게 전주 생활을 시작했던 만큼 형이 외로울 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며 "'유대수보다 지용출이 유명하잖아. 전주 사람 다 됐네'라고 농담을 나누기도 했는데, 살만 하니까 갔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함께 전북민미협을 탄생시킨 송만규 전 전북민예총 회장은 "전북민미협 창립을 준비하고 있을 때 그가 서울에서 내려와 결합했는데, 그는 창작 중심으로 회원들과 많은 이야기를 해나갔다"며 "따뜻하고 섬세한 성격이었다"고 떠올렸다.
초기 그는 동판과 석판을 하기도 했지만 공해물질을 배출하지 않고 칼만 있으면 사계절할 수 있는 목판에 정착했다. 전북민미협과 전북판화가협회 회장, 문화연구 창 이사 등을 지내며 직접 염색한 황토종이에 판화를 찍어내거나 지역 역사를 담아낸 현대판 지도를 제작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자신이 해오던 작업 방식에 중국 판화 제작 방식을 결합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판각 방식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는 올해 전라북도가 지원하는 '수도권전시지원사업'에 선정돼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기로 돼있었다. 유씨는 "최근에는 소나무를 그렸었다"며 "투박하고 사납고 거칠고 큼직큼직했던 작품이 전북에 내려와서 한결 정교하고 부드러워 졌다"고 말했다. 동료들은 지씨가 준비해 온 개인전을 유작전으로 꾸리기로 했다.
"나는 좀 늦다"던 판화가. 그러나 그는 짧은 생을 너무 빨리 살다 갔다. "파다가 죽겠어요."라며 웃던 그가 우리는 그립다.
전북민예총은 간결함을 좋아했던 고인의 삶을 따라 간단하게나마 '민족예술인 고 지용출 화가 노제'를 열기로 했다. 빈소는 전주시 효자동 우전성당. 20일 오전 10시 전주 효자동 우림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치른 뒤 오전 11시30분 김제시 금구면 선암리에 있는 지씨의 작업실에서 노제를 치른다. 고인은 오후 1시 승화원에서 화장돼 소양방면 천주교묘역 천주교유지재단 금상동성당 하늘자리에 안치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