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은 기원전 1세기 무렵 거의 비슷한 시기에 태동하여 주위의 토착세력을 통합하며 점차 중앙집권적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마침내 한반도를 중심으로 삼국이 정립(鼎立)하며 생존을 위한 경쟁에 돌입하여 외교적 견제와 전쟁이 반복되는 가운데, 5세기에 이르면 고구려는 그 세력이 강대해진다. 관제의 개혁으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한 고구려는 정복사업을 통해 세력의 팽창을 추진하였다. 한 이후로 중국이 삼국으로 나뉘고 다시 5호16국으로 분열된 틈을 노려 고조선 이후 점령당했던 대동강 유역을 수복하였으나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등 전쟁의 상흔 또한 만만치 않았다. 소수림왕의 개혁정치를 이어받은 광개토왕(재위 391~413)은 고구려를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나라로 성장시켜 마침내 고구려시대를 열었다.
광개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장수왕은 414년에 선왕의 위업을 기리는 비를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지금의 길림성) 집안(集安)의 왕릉 곁에 세웠다. 비의 정식 명칭은 '국강상광개토평안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平安好太王碑)'이다. 높이 6.39m의 거대한 자연석(凝灰巖) 비에는 고구려의 정복활동과 삼국의 관계 그리고 왜에 관한 기사 등 1800여 자가 실려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최고 최대의 비로 알려져 있으며, 대제국 고구려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 상징이다.
그러나 비는 고구려와 운명을 같이 하여 오랫동안 매몰되어 있었고, 청나라 때에는 그 지역이 만주족의 발상지로 신성시되어 통행이 금지되어 역사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그리고 1876년 중국인 관월산(關月山)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일본은 이 소식을 접하고 육군참모본부의 정보원이었던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 중위가 비밀리에 중국에 파견하여 1884년 광개토대왕비를 찾아 채탁하여 갔고, 육군참모본부는 그것을 토대로 쌍구가묵본으로 만들어 1889년에 회여록(會餘錄)에 소개하였다. 이로써 비문에 대한 해독이 진행되면서 고구려의 실체와 고대 한일관계 등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후 100여 년 동안 한·중·일의 학자들의 연구가 발표되는 가운데 재일사학자 이진희(李進熙)씨에 의해 일본이 비문을 변조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폭로되었고, 다시 이에 대한 중국인 왕건군(王健群) 반론이 제기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그런데 100 여 년이 지난 20세기 말에 동경국립박물관에서 돌연 이 쌍구본을 처음으로 공개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대사에 대한 쟁점의 부활은 물론 역사에 대한 인식이 이전보다 훨씬 강화된 상태에서 또다시 연구 결과들이 발표되었다.
최근 중국은 종래의 중화주의에서 벗어나 자국 중심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동북공정을 단행하는 한편 광개토호대왕비를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함으로써 비의 보호를 이유로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이전에도 언급하였듯이 우리의 고대사에 대하여 일본의 조작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또 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해 왜곡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할 때,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종래 이 문제에 대하여 일본과 중국이 국가적 차원에서 대처하고 있는 것에 비하여 우리는 특정한 몇몇 학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을 문제삼기에 앞서 우리의 학문적 태도와 역사인식부터 다져야 한다. 정복의 역사는 비단 토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인식에까지 해당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비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몇 차례에 걸쳐 비의 역사적 의의와 쟁점의 상황, 그리고 서예사적 가치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