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렌이 울린다. 그 소리가 낯설다. 무덤덤해진 신경을 깨운다. 한 켠으로 밀려나 있던 감각을 동원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무슨 소리지? 10시! 아, 현충일이지…." 읽던 책을 덮고 잠시 소리가 그칠 때까지 사이렌의 취지에 동참해본다. 그 동참이 그리 어색하지 않은 걸 보면, 나도 이제 나이가 먹어가긴 가나보다. 죽음이 어떤 모습이었든 간에 애도에 동참한다는 것은 인격이 성숙되었든지 죽을 때가 가까워졌든지 둘 중 하나일 텐데, 애당초 성숙하고는 거리가 먼 까닭에 드는 생각이다. 이때 문득 천안함 사태로 죽은 젊은 영혼들과 함께, 며칠 전에 보았던 글이 떠올랐다. 먼저 글에 대해.
▲ 죽으려고 기를 썼던 사람들
18세기 중반 위백규(魏伯珪)란 학자가 썼는데, 오씨(吳氏)라는 '열녀(烈女)'를 표창하라고 중앙 조정에 올린 글이었다. 강진현(康津縣)에 살던 오씨는 장씨(張氏) 집안에 시집을 와서 남편이 죽자 열 달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자신의 남편을 따라 죽었다고 한다. 남편은 원래 기이한 질병을 앓고 있었는데, 혼인하던 날 저녁에 재발하여 쓰러졌고, 며칠 뒤에 숨을 거두었다.
오씨는 충격으로 기절했지만 곧 회복되었다. 그러나 마실 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염습이 끝나고 나서, 두 노인을 생각해서 목숨을 보존하라는 시부모의 간청에 오씨는 쌀죽을 가져오게 하여 먹었는데, 세 끼 먹은 것을 모두 합해도 한 움큼도 되지 않았다. 친정에 돌아와서도 음식 먹기를 거부하자, 친정 부모는 자신들이 곡기를 끊는 방법을 써가면서까지 딸에게 음식을 권했다. 이러기를 여러 차례, 가매장한 남편의 장례를 치를 때가 되어 시가로 가는 도중에도 기진하여 쓰러질 상황이 되자 아버지의 권유로 곶감 한 쪽을 삼켰을 뿐이었다. 남편이 죽은 지 1년이 될 무렵엔 얼굴에 핏기가 다하고 피부가 야위었으며 머리카락이 썩어 빠져 남은 것이 없었다. 마침내 〈영결장(永訣狀)〉을 지은 뒤 한바탕 통곡하고는 이내 숨을 거두었다.
이 열녀를 표창하자고 건의했던 위백규는 또 다른 열녀 최씨의 표창도 건의했는데, 최씨 역시 남편이 죽자 무명을 찢어서 새끼줄을 만들어 자신의 목에 묶어 자결했다. 죽을 때의 상황도 아주 상세히 묘사했는데, 최씨는 삼베줄을 새끼줄 끝에 이어서 관 밑으로 두르고는 손으로 잡아당겨 단정히 관 옆에 앉아서 세상을 떴는데, 어찌나 꽉 잡았던지 죽은 뒤에 시신을 발견한 사람들이 손에서 줄을 뺄 수가 없었다고 한다.
▲ 그 죽음을 기렸던 몇 가지 눈들
오씨와 최씨를 소개했던 위백규는 「맹자」, 「예기」, 「시경」, 「논어」 등 권위 있는 '고전'을 근거로 이들의 죽음에 정당성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만고(萬古)에 한 번 있을 죽음'이라고 평가했다. 흔히 이 시기에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면서 나타난 '열녀 만들기'라고 이런 현상을 해석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보다 앞선 16세기 중반의 이문건(李文健)이란 학자가 쓴 「양아록(養兒錄)」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손녀인 숙희 모녀가 할머니를 정성스럽게 간호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다시 병석에 누웠다. 그러자 숙희는 또 할머니의 변을 먹고 자신의 다리 살을 도려내 할머니에게 먹였다. 그러나 도려낸 곳에는 좀처럼 새살이 돋아나지 않았고, 변의 독이 온몸에 퍼져 숙희는 심하게 앓았다. 이문건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는 '손녀의 효심이 기특하기만 했다.' 어떻게 저런 '엽기적인 손녀'의 효심이 기특했을까?
임진왜란 당시 의병 활동을 한 정경운(鄭慶雲)이 남긴 「고대일록(孤臺日錄)」의 기록도 만만치 않다. 정경운은 정유재란 때 딸을 잃었는데, 조카가 산에서 딸 정아(貞兒)의 시신을 찾았다고 한다. 목이 반 이상 잘린 채로 바위 사이에 넘어져 있었는데 차고 있던 칼과 손이 모두 평소대로였다. 정경운은 왜적들이 몹쓸 짓을 한다는 말을 듣고 딸에게 자신이 찼던 칼을 주면서 '만약 불행한 일을 만나면 절대 왜적의 뜻에 따르지 말라'고 일렀던 적이 있었다.
정경운은 딸의 죽음을 놓고 이렇게 썼다.
'드디어 흉악한 왜적을 만나자 당당하게 겁도 없이 왜적을 나무라면서 생(生)을 버리고 절개를 온전히 하였으니, 곧구나, 내 딸이여. 그 이름(貞兒! 바른 아이!)에 부끄럽지 않다. 오호라, 네가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한 것은 잘하기는 잘한 일이지만, 내가 딸의 목숨도 구하지 못해 흉적의 칼 아래 운명케 하였구나. 손을 붙들고 피난하여 시작과 끝을 함께 하고자 하였는데. 훗날 구천(九泉)에서 손을 잡고 다시 만날 때, 내 진실로 너만 못하니 무슨 낯으로 너를 위로하겠느냐? 너의 높은 절개는 내가 전(傳)을 지어 그 뜻을 기록할 것이다.'
▲ 과장된 추모, 그리고 해석의 유보
지금 우리는 열녀나 효자 만들기가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폄하하려고 위의 사례를 살펴본 것이 아니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잘 모르겠다. 나로 말하자면, 위의 사례를 비인간적으로 보기보다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쪽이다. 열녀 만들기를 놓고, 통상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을 남성에게 성적으로 종속시키는 권력의 작동이자 장치라고 해석하는데, 역시 모르겠다.
첩(妾)을 두는 일이라면 몰라도, 죽은 뒤에 열녀(烈女·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여자)나 절부(節婦·남편이 죽은 뒤에 수절한 여자)가 남성중심의 성적 욕망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성적 욕망은 구체적 효과가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성적 욕망'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적어도 텔레비전에서 묘사되는 성적 욕망 같은 거라면, 그러니까 축첩의 동기로 곧잘 이해되는 그런 성적 욕망 같은 거라면 열녀 만들기를 설명하는 데는 미흡하다. 물론 흔히 이해하듯이 축첩이라는 것도 많은 남성들이 부러워하듯 그렇게 성적 욕망의 충족이라는 이유로 설명되지 않는다. 사실 이런 해석은 오히려 현재 한국 남성들이 여성과의 '성적 관계'를 어떤 수준에서 이해하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좋은 지표라는 점이 오히려 흥미롭다.
또한 살아서 절개를 지키는 여성을 기리는 절부 이데올로기는 노동력의 확보라는 점에서 경제논리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열녀는 그렇지도 않다. 열녀 만들기는 경제적 가치가 없는 것이다. 열녀의 남편 가문이나 친정의 사회적 위신(威信)이 중요했으리라는 추정은 의미가 있다. 윤리는 생물학적, 경제학적 근거만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서 만들어지기도 하는 것이므로. 열녀 만들기를 설명할 '성적 욕망'이 훨씬 복잡한 성격의 것이라는 예감이 드는 지점이다. 아울러 비난에 그칠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래서 그 억압성이 재현되지 않도록 하려면, 필요한 것은 단정이 아니라 유보일 것이다.
▲ 국민국가에서 재현된 추모제의 기만성
그렇다고 해서,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 할머니 병구완을 하는 손녀를 기특하게 쳐다볼 효심도 없고, 목이 반쯤 잘린 딸아이를 놓고 절개를 지켰다고 말할 신념도 없다. 나아가, 내가 간섭할 영역이, 정확히 말하자면 간섭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내가 죽은 뒤 아내가 열녀나 절부가 되고 말고는 관심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위의 추모 방식이 매우 어색하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런 어색한 추모 방식은 어느 특정 시대의 산물이 아니다.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어떤 죽음'에 대해서는 특별히 취급해왔다. 우리는 죽은 사람에게 험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좋은 말로 떠나보낸다. 그것은 죽은 사람이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인지상정을 넘어서는 특별대우가 있다. 그 특별한 취급 때문에, 열녀전과 함께 천안함이 현충일 사렌 소리와 동시에 내 머릿속에 떠올랐을 것이다.
천안함 침몰 직후 침몰 원인조사는 더디게 진행되었고, 그동안 전사한 장병의 장례식이 국민들의 애도 속에 치러졌다. 한창 젊은 사람들의 죽음이라서가 아니라, 조금 있으면 이들 나이가 되는 애들이 있기에 나도 마음이 아팠다. 그들 부모 생각에…. 그렇지만 그들의 죽음은 이런 애도가 끼어들 틈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두 가지 의미에서. 하나는 국립묘지를 가지고 군인의 죽음을 독점적으로 전유(專有)하는 국민국가에 의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장병들의 희생 = 국가 = 수구정권'이라는 구린내 나는 등식에 의해서.
국립묘지로 환원되는 애도에는 그나마 이유라도 있다. 그들이 군인이고, 적어도 국가는 싫든 좋든 사람들이 삶을 꾸려가는 사회의 하나이니까. 그러나 두번째 등식은 다르다. 국가사랑을 입으로 부르짖는 병역미필자가 다수인 지배집단이 마치 숭고한 국가의 애국자인 양 전도된다.
남재일 경북대 교수의 말처럼 '장병들의 희생과 국가안보라는 공유가치 뒤에 숨어버린 이 정치적 탐욕을 지적하려면 희생자 유족의 상처를 건드리는 무례한 인간이 되거나 국가안보를 부정하는 좌파로 매도당한다. 이렇게 전사 장병과 유족에 대한 군과 정부의 불편한 입장이 정리됐다. 이로써 말의 진정성을 죽이고 공유가치를 훼손하면서 소통의 기저를 좀먹는 문법이 완성된다.' 그 문법은 아직 진행중이다.
/오항녕(전주대 연구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