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지'라고 그러대요. 이희중씨가 끄집어낸 이야기인데, 80년대 초 내 시를 처음으로 봤는데, 참 좋았대요. 그런데 서정시를 읽는 시대가 아니었다는 거죠. 남 앞에서 나는 이 사람의 시를 좋아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던, 상당히 무자비하고 살벌한 시대였기 때문에 지하로 들어가 눈빛으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하조직이라고…. 어떤 면에서는 내가 고국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무감각했었고, 이해하지 못했었고, 어떻게 보면 몰염치한 문인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미국에서 의사로 살며 모국어로 시를 써 온 마종기 시인(71)은 '마종기의 시를 사랑하는 지하조직'의 성원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보스를 향한 조직원들의 추종은 절대적이어서 지난달에는 시인의 등단 5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가 서울 대학로 한 소극장에서 마련됐다.
지난 12일과 13일 전라북도로의 여행 역시 순전히 '마사지' 조직원들 덕분이었다. 정읍 산외에 사는 이희중 시인(전주대 교수)의 집에서 하룻밤 묵고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을 만나기 위해 전주에 온 참이었다. 물론, 권혁웅 이병률 나희덕 시인과 김수이 문학평론가 등 '마사지' 조직원들과의 동행이었다.
"전주는 5년 전에도 오고, 7년 전에도 한 번 왔었어요. 오밀조밀 예쁘고, 한국 전통의 옛 모습이 살아있어 좋아요. 올 때마다 콩나물국밥이 너무나 맛있어요. 권혁웅 시인 같은 경우는 자기는 술 먹고 콩나물국밥이 생각나면 2시간, 2시간 반 만에 전주에 내려오면 되는데, 그런 면에서 선생님은 불행하십니다 라고 말하더군요. 공감이 됐어요."
마종기 시인은 1959년 「현대문학」에 '해부학교실'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으며 연세대 의과대학 1학년 때 첫 시집 「조용한 개선」을 출간했다. 하지만 1965년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시절 한일회담 반대성명에 참여했다가 이듬해 6월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났다. 그의 아버지 아동문학가 마해송 선생(1905∼1966)은 "갔다와서 만나자"며 떠나는 아들의 절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으로 떠난 지 다섯달 만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돈도 휴가도 없던 젊은 의사는 임종도 못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가난하지만 부끄럽지 않게, 당신이 좋아하는 동화를 쓰고 살았던 아버지. 착하게 살아야 하고 신세를 지면 갚아야 하는, 아주 자잘한 아버지의 인생관은 아들의 삶을 이끌었다. 그는 "내 시가 나쁘다 좋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않으셨지만, 내 인생에 아버지는 가장 큰 분으로 평생의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중·고등학교 때 같이 문예반 활동을 했던 황동규 시인은 목숨을 내놓고 문학을 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러질 못했어요. 내가 의학을 하지 않고, 외국에 살지 않고, 또 시를 쓰지 않았다면…. 내가 감상적이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편인데, 돌이켜 보면 외국에서 의사생활을 하기 위해 시를 쓴 것 같아요. 말하자면 상호작용인 거죠."
그는 "아무리 볼품없는 시일지라도 외국에서 평생의 대부분을 살고, 외국어를 일상어로 쓰면서 모국어로 수백편의 시를 써왔다면, 그 인간의 가슴 어느 곳에 몇 개의 상처가 없을 수 없을 것"이라며 "문학이 나에게는 위로였으며, 치유였다"고 말했다.
지난달 펴낸 시집 「하늘의 맨살」(문학과지성사)은 4년 동안 쓴 시를 모은 것. 시 몇 편이 마음에 맞지 않아 50년 시력의 그에게 열등감 같은 이상한 감정을 안겨준 시집이기도 하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시작 에세이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비채)는 '낳지도 않고, 평생의 절반도 살지 않은, 그러나 언제나 내 삶의 중심에서 나를 지탱해준 조국'에 바치는 책이다. 그동안 쓴 수많은 시들 중 50편을 골라 그와 관련된 이야기나 분위기에 대한 글을 함께 적었다. 오랜 전 쓴 시들이 왠지 안쓰러워 이유를 알 수 없는 얇은 슬픔이 시인을 감싸오기도 했다.
그 누구도 아닌, 외로웠던 나 자신을 위해 써온 시들. 그의 진심은 "내 시가 한국의 문학사에 남기보다는 내 시를 읽어준 그 사람의 가슴에 남아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