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스트를..' 세계 석학 27명과 데이트

노벨상문학상 수상자인 나딘 고디머, 월레 소잉카, 아인슈타인 이후 최고의 물리학자로 불리는 일리야 프리고진, '문명의 충돌'로 유명한 새뮤얼 헌팅턴 등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면..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책에서는 가능하다.

 

'휴머니스트를 위하여'(사계절 펴냄)는 세계 지성 27명과의 인터뷰를 엮은 대담집이다.

 

저자인 콘스탄틴 폰 바를뢰벤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 과학분과 위원은 문학, 종교, 인류학, 자연과학, 음악, 미술 등의 분야에서 20세기에 깊은 족적을 남긴 석학 27명을 직접 찾아가 문명의 공존과 충돌, 과학기술의 가능성과 한계 등에 대한 이들의 의견을 들었다.

 

저자는 장장 8년에 걸쳐 이들을 만났다.

 

27명 중에는 프리고진을 비롯해 인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 예후디 메뉴인처럼 이미 고인(故人)이 된 이들도 적지 않다.

 

572쪽에 달하는 두꺼운 분량이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마치 독자가 석학들을 직접 인터뷰하는 것 같은 생생함과 지적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저서 '슬픈 열대'로 유명한 레비스트로스는 문화간 진정한 대화가 가능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문화 간의 대화는 예전부터 줄곧 존재했습니다. 문화권들은 언제나 뭔가를 교환하며 교류했습니다"라면서 그러나 전자 미디어, 인터넷 등은 문화 간의 대화에는 오히려 악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해서 내가 한 줌의 재로 변할 거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한 줌의 재로 사라질 거라는 생각 때문에 불안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헌팅턴은 여러 문명 가운데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서구 세계에 대해 "서구 세계가 앞으로도 지배적인 위치를 유지할 겁니다"라면서 중국과 이슬람권이 서구와 경쟁할 만한 두 문명권으로 부상하겠지만 서구 세계를 밀어낼 정도는 아니고 도전하는 수준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고디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누구도 자신의 뿌리가 뭔지 드러내고 자랑할 것도 아니지만 부인할 것도 없습니다"라면서 "우리는 그저 다 같은 인간일 뿐입니다"라고 현답을 내놓는다.

 

이 책은 27명의 석학들의 다양한 관점을 담고 있지만 세계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대화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저자는 후기에서 "그들에게서 우리가 얻은 결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대화'"라면서 대화의 역할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국제정치와 경제에서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강주헌 옮김. 2만9천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