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한반도에서의 남북간 대결에만 머문 전쟁이 아니었다. 동북아 및 세계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일대 사건이었다. 오늘날 북핵문제를 둘러싼 6자 회담이나 천안함 사건 등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한반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갈라져 북쪽에 소련군이, 남쪽에 미군이 진주해 군정을 실시했다. 남쪽에는 이승만, 북쪽에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정부를 수립했으나 실질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영향하에 있었다. 깨지기 쉬운 그릇처럼 불안한 평화 위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이 무렵 북한의 김일성은 수차례 소련과 중국의 최고 지도자를 만나 무력침공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소련의 지배자인 스탈린은 미국을 의식해 소극적이었으나 중국의 통치자 모택동은 적극적이었다. 결국 소련은 중국이 북한에 전쟁 원조를 하는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승락했다.
반면 미국은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였고 소련의 위성국가로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없다고 오판하였다. 또 전쟁 직전까지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저평가해 특별한 대비를 하지 않았다.
그러데도 이승만은 외신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실지(失地)를 회복하겠다"고 장담했다. 한술 더 떠 채병덕 육참총장은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고 호기를 부렸다.
이같은 상황속에 6·25 전쟁은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3년 1개월에 걸쳐 한반도 전체가 폐허화되었다. 남북 양측을 합해 250만 명이 숨졌고 1000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을 남겼다. 전체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고 산업시설과 공공시설, 교통시설의 80%가 절단났다.
전쟁을 통해 북한의 김일성은 자신의 정적을 효과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유일체제의 기반을 닦았다. 또 남한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공고화되고 우경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러한 상흔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진행형이다. 남북간의 첨예한 대결은 물론 진보와 보수의 갈등도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찌기 '전쟁론(戰爭論)'을 쓴 K.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적 수단과 다른 수단으로 계속되는 정치에 불과하다"는 불후의 명언을 남겼다. 정치지도자의 서투른 판단이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말해준다.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조상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