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는 1935년 광개토호태왕비와 태왕릉이 있는 중국 길림성 집안현 동북쪽의 언덕 하양어두(下羊魚頭)의 고분 내에서 발견되었다. 고분은 석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실(前室)과 주실(主室)로 나뉘어져 있는데, 모두루묘지는 전실의 정면 위쪽에 길게 회벽을 바른 위에 쓰여져 있다. 가로와 세로로 계선을 긋고 80행 800여자에 달하는 내용을 묵서하였으나 결락된 부분이 많아 현재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250여 자에 불과하다.
묘지의 일반적인 구성원칙에 따라 '大使者牟頭婁'라는 제하에 "하백의 손자이시요 해와 달의 아들이신 추모성왕께서는 본디 북부여로부터 나오셨다."는 내용으로 시작하는데, 고구려의 건국 신화가 실려 있는 광개토호태왕비의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이후로 결락된 틈으로 보이는 비문의 내용은 모두루의 선조가 북부여에서부터 (추모)성왕을 따르며 반역사건을 진압한 것을 계기로 그의 노객(奴客)이 되었고, 고국원왕으로 추정되는 국강상성태왕 때에는 북부여를 침입한 북방의 선비족을 물리치는 등 전공을 세워 대대로 관은을 입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묘지의 당사자인 모두루는 광개토대왕 때에 선조의 공에 힘입어 북부여 수사(守事)로 파견되었으며, 이 곳에서 광개토대왕의 부음소식을 듣고 애통해 하였음을 적고 있다. 이로써 모두루는 광개토대왕 시절 즉, 5세기 전반에 생존하며 북부여의 지방관으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묘지에서 왕의 호칭을 '鄒牟聖王' '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 등 공통적으로 성왕(聖王)이라 칭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이 묘지를 통해 4~5세기 고구려 왕권과 그에 대한 도전의 양상, 그리고 지방통치와 씨족 계승의식 등을 살필 수 있다.
또 하나 주목을 끄는 것은 묘지가 묵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5세기 전반기의 묵흔을 오늘날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지만, 일견 그 서체면에서 볼 때에도 광개토호태왕비와는 전혀 다른 필치를 보이고 있어 더욱 신비하게 느껴진다. 서체에 대한 일반적인 평을 살펴보면, 당시 고구려에서 상용되었던 것으로 예서의 필법이 잔존해 있는 해서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비문과 같은 금석문이 아니고 실제로 쓰여진 묵서라는 점에서 엄격한 형식적 규율보다는 자유롭게 서사된 느낌이 강하며 개성적인 필치가 많이 가미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고구려의 비에서 나타나는 질박함과는 달리 날렵하고 생동감 넘치는 거침없는 운필은 전혀 망설임이 없다. 이미 그 글씨에 일정한 체의 격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체격은 해서라기보다는 예서에 가까우며 예서 중에서도 행기를 많이 띠고 있는 간백(簡帛) 문자를 연상케 한다. 필속의 느낌이나 파책에서 급격하게 평포(平鋪)를 이루는 것, 생략된 필획을 사용하고 있는 것들이 그렇다.
여기에서 고대사료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있다. 고대사를 연구할 때 현재 남아있는 비문 중심으로 연구할 경우 자칫 편견에 빠질 염려가 있다는 점이다. 고대사료의 발굴은 그 역사적인 가치를 떠나 문화사적인 면에서도 충분히 검토되어야 한다. 모두루묘지와 같은 묵서 묘지는 그가 일개 지방관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초월하여 강한 민족적 자긍심을 전제하고, 자신의 씨족에 대해서도 큰 자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씨족적 자부심이 민족적 자긍심을 전제로 한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모두루묘지는 고구려인들의 민족적 의식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며, 또 그 기상을 여과 없는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담아내고 있다. 모두루묘지 묵서는 고구려인의 예술적 기질을 유감 없이 드러낸 귀중한 1차 자료인 것이다.
/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