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42)덕흥리고분 묵서묘지

고구려사·서예사적 연구 또 다른 가치…가볍게 춤추는 듯한 필세, 중후한 맛 느껴져

고구려 덕흥리고분 묘지묵서, 408년 (desk@jjan.kr)

 

2002년 12월 6일부터 2003년 3월 2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 특별전시장에서 '특별기획전 고구려! 평양에서 온 고분 벽화와 유물'이 개최되었다. 중앙일보와 민족화해협력국민협의회(민화협), (주)SBS가 공동 주최하고 조선중앙력사박물관과 재일본조선력사고고학협회가 특별 후원한 이 전시는 50년 남북 단절의 역사를 잇는 민족화해의 자리로 주최측이 4년여만에 성사시킨 값진 행사였다.

 

고대사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대규모의 발굴유물들이 전시되어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기에 충분했지만, 그에 대한 역사적 해석은 아직도 분분하여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즉 고구려에 대한 기원설조차 남북한이 다른 주장을 제기하고 있는 형편이니, 고대사 연구의 문제점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전시였다. 전시의 유물 가운데 필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기록이 담긴 역사물이다. 청동불상의 광배에 새겨진 명문도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고분에서 발견된 묘지묵서이다. 묵서는 비명과 달리 새김의 단계를 거치지 않은 1차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한다. 안악3호분과 덕흥리 고분에서 발견된 묵서는 역사적 의미는 물론이고 서예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76년 관개수로 공사 중 발견된 평안남도 남포시 소재 덕흥리 벽화에는 풍부한 벽화 속에 설명이 가미되어 있고, 묵서묘지까지 남아 있어 고구려사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에는 벽화의 주인공인 유주자사 진(鎭)이 위엄 있는 자세로 앉아서 13인의 각 지역 태수로부터 공손히 보고를 받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를 통하여 당시 고구려의 치세영역을 산정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20세기의 역사적 발견이라 할 만하다. 묘지의 주인인 진은 광개토왕대의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지만,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전히 설이 분분하다. 다만 그가 고유한 고구려인이 아니라 고구려에 망명한 북방민족 출신이라는 점은 대체로 일치하고 있는 듯하다.

 

임창순은 묵서묘지와 관련하여, "덕흥리 고분 벽서는 모두루묘지와 같이 전실북벽에 먹으로 쓰여 있는 것인데 그 체재는 서로 다르다. 모두루묘지는 모두루의 경력과 업적을 서술한 것이나 이것은 공주 무녕왕릉의 매지권과 비슷한 도교적인 주송(呪誦)을 쓴 것이다. 이런 예는 중국의 한진시대의 유적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자체는 모두루묘지와 같이 예의(隸意)를 지닌 해서인데 다만 모두루묘지는 행필이 표일(飄逸)하여 가볍게 춤추는 듯한 필세인데 비하여 이 글씨는 중후한 맛이 있다. 전자를 동적이라 한다면 이것은 정적인 필의가 짙게 보인다."고 평하였다.

 

앞서 소개한 모두루묘지가 그 내용과 필치면에서 고구려인의 활달한 감성을 담고 있는데 반하여 덕흥리고분 묘지는 다소 권위적인 모습을 연상시키는 평정한 위엄을 담고 있는 것이다. 또 모두루묘지가 계선을 긋어 정해진 공간에 글자를 배열하는 치밀함을 추구하고 있는데 비하여 덕흥리 고분은 각 행의 윗 선만을 가지런하게 맞추어 자유롭게 묵사했다는 점도 대비된다. 예술적 입장에서 보면 모두루묘지가 완성도가 높은 것이 분명하지만 덕흥리고분 묘지는 그보다 시대가 앞선다는 점에서 또 다른 가치를 지닌다. 16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깜깜한 현실(玄室)에서 오롯이 묵흔을 간직한 채 역사의 일면을 전하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참으로 신비하고 감개할 따름이다.

 

/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