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수리조합은 전라북도 정읍·부안·김제지역에 걸친 일대 수리조합이다. 섬진강에 90척(尺)의 둑을 쌓고 저수량 21억6000입방척(立方尺), 주위 18리(里)의 운암저수지를 만들어 3년에 한 번씩 한발을 겪은 지방이 일약 벼 45만석 내지 50만석 증수를 가져와 오늘날 조선 제일, 아니 일본 제일의 수리조합이다'(조선농회보, 1930년)
동진강 유역에서의 수리조합 설치 논의는 만경강 유역과 비슷한 무렵에 시작되었다. 1909년 이시가와현(石川縣)농업주식회사 전무 기타오(北尾營太郞)와 이완용농장 주임 이근파가 중심이 되어 당시 도지부 대신에게 수리사업 청원서를 제출한 것이 최초다.
1910년 동진강 남부와 북부에 각각 별도의 수리조합 설치 청원서, 다음해인 1911년에는 두 조합을 묶은 동진강수리조합 설치 청원서가 제출되었으나 지주들의 이해관계 대립으로 진척이 없었다. 이후에도 여러차례 회의 개최와 측량 조사 등 수리조합 설립 시도가 있었으나 비로소 1925년에 가서야 설립인가를 받았다.
동진강유역의 수리조합이 만경강유역에 비해 다소 늦었던 것은 관개용수 부족 때문이다. 동진강 유역은 상류와 하류의 지형적 차이가 크고 강바닥이 얕아 많은 유량을 수용할 수 없어 항상 수자원이 부족했다.
1910년 동진강 유역 남부와 북부에 별도 수리조합 설치인가 신청서를 제출한 것도 상·하류의 지형차로 인한 용수문제였다. 남부지역 지주들이 북부지역 수리조합 구역에 포함될 경우 자신들의 농지 관개용수가 부족해질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수리조합 설립과정에서 동진강 유역 수자원 확보를 위한 대안으로 벽골제를 저수답으로 하고 죽산보(竹山洑)를 철폐하자는 제안까지 있었다. 상류지역의 대지주였던 구마모토(熊本利平)와 하류지역의 다기(多木久米次郞)가 조합비 부과문제로 심하게 대립한 유명한 일화 또한 동진강 유역 물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1924년 대한발을 겪으면서 막대한 자금을 동원, 섬진강 수자원을 유역변경시켜 동진강 일대의 평야를 관개한다는 계획 하에 1925년 동진수리조합 설립인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사실 동진강 유역에 최초로 설립된 수리조합은 본류와 별계의 수계를 가진 고부천 유역을 몽리구역으로 한 고부수리조합이다. 1913년 고부군수가 고부평야 지주들을 소집하여 지주총회를 열고 수리조합 설립건을 가결시킴에 따라 1916년 고부수리조합이 설립됐다.
원래 고부지방은 국유지와 왕실토지가 많았다. 전통적인 제언인 눌제(訥堤)도 있었다. 이 지역 토지는 대부분 동양척식회사에 불하되고 눌제를 이용하여 상류쪽에 흥덕제(興德堤)라는 새로운 저수지를 만들어 그 밑으로 수로를 설치하는 것이 매우 용이하였다.
1942년 동진수리조합은 고부수리조합과 영원수리조합을 흡수 합병하였다. 이로써 창립 당시 몽리면적 1만5000ha 조합원 3600명 규모였던 동진수리조합은 3개 조합 합병으로 몽리면적 2만3000ha 조합원 6600명에 이르는 전국 최대 규모의 수리조합으로 몸집을 불렸다.
동진강 유역 수리조합 사업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계층은 일본인 지주들이었다. 당시 동진강 일대에 1000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는 동양척식회사를 비롯하여 동진농업주식회사, 구마모토장(熊本)농장, 다기(多木)농장, 이시가와현(石川懸)농업주식회사 등 5명이었고, 그 외 중소 지주가 3500여명이었다.
일본인 지주들은 수리조합 설립 당시부터 창립위원 또는 상설위원, 평의원 등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설립후 운영에도 적극 관여했다.
동진강 유역에 근대적인 수리시설을 갖추기 시작하여 관개용수가 확보되고 농업기술이 발달됨에 따라 미곡 생산량도 늘었다. 당시 현미로 따져서 전북지역 10a당 현미 생산량이 평균 1석이었지만 동진강 유역은 1.5석 내지 2.0석으로 증대됐다. 아베(阿部)와 같은 지주는 동진강 하류(현재 김제시 광활면) 간척에 필요한 용수를 확보하여 가장 큰 이득을 취한 경우이다.
반면에 동진강 유역의 조선인 중소 지주는 수리조합비의 과중한 부담으로 토지 상실이 급격하게 이루어졌다. 조선인 중소지주의 토지 방매가 빈번하게 일어난 사실은 동진수리조합내 토지이동 상황에서도 확인된다. 사업 시공후 증수량 벼값 환산액에 대한 조합비의 비율은 20~40%로 상당히 높아 1929년 정읍 산외면 평사리에서는 중소지주들이 조합비 불납동맹까지 벌인 적도 있었다.
동진강유역 수리조합 사업은 일반 농민들보다는 지주, 특히 일본인 지주의 이익을 옹호하고 식민지 지주제를 더욱 강화시켰다. 전통적인 제언이나 보(洑) 등 재래 수리시설은 주민 자치조직으로 운영되었지만, 수리조합 사업으로 대다수 농민은 근대적 수리시설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이는 동진강 유역에 일본인 지주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수리·영농질서가 형성된 것을 의미한다. 농업생산과 토지소유를 둘러싼 식민지 농업개발의 결과였으며 근대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소순열(전북대 농업경제학과 교수)
※ 공동기획: 만경강 생태하천가꾸기민관학협의회·정읍의제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