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필자가 사는 천호산골에 두 분의 목사님, 두 분의 원불교 교무님, 한 분의 성공회 신부님, 그리고 이곳에서 일하는 두 명의 천주교 신부들이 함께 모였다. 주일 오후 해거름에 만나 삼계탕을 한 그릇씩 먹고 나서 별이 총총한 하늘아래 모여 앉아 서로가 안고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함께 해야 할 일들을 앞세운 특별한 자리가 아니었어도 마치 오랜 만남을 계속해온 것처럼 마음의 깊이가 느껴졌다. 서로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좋은 세상을 위한 희망을 일깨우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인지라 세상과 삶에 대한 애정과 염려도 덧없는 푸념처럼 허공에 흩어지지 않아서 좋았다.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만나면 흔히 서로가 지니고 있는 벽을 의식하게 마련이다. 그 벽을 넘어서는 길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다. 가끔 사람들 사이에 드리워져 있는 종교라는 이름의 벽이 너무 견고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 가슴이 철렁해 지는 때가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겪은 참혹한 싸움과 분열의 배경에는 흔히 종교가 자리를 잡고 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는 인간성의 가장 고귀한 차원인 영적인 삶을 지향하고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만, 이념화된 종교, 체제화된 신앙, 교조화된 교리들은 넘어설 수 없는 벽이 되어 사람들을 가두기도 하고, 서로 넘볼 수 없는 울타리가 되어 사람들을 갈라놓기도 한다. 종교라는 벽을 만들고 그 안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덕분에 누리는 안위와 안정성을 신앙의 축복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 내가 선 자리를 돌아보며 부끄러울 때가 있다.
작년 10월, 우리 고장의 전통과 문화를 상징하는 한옥마을에는 송광사에서 달려오신 스님, 한복을 입은 교무님, 어려운 발걸음을 마다하지 않으신 목사님, 묵묵히 순례의 신발 끈을 묶고 계신 주교님과 함께한 1000여명의 순례자들이 모여 경기전 앞에서부터 순례길을 걸었다. 하루 길을 걸어 도착한 송광사에서 모든 사람들이 저녁공양을 받았고, 세상과 이웃의 평화, 자신의 진솔한 삶을 기원하며 모두 함께 저녁예불을 바쳤다. 예불을 마치고 달빛을 밟으며 돌아가는 길에서 사람들은 가슴으로 느꼈다, 혼자서 빨리 가는 길보다 천천히 함께 가는 길이 더 아름답다는 것을.
그렇게 시작된 아름다운 순례길은, 순례자들의 심벌인 달팽이처럼 느리게, 바르게, 기쁘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길을 걷는 순
례자들을 '느바기'라고 부른다.
아름다운 순례길이라지만 이 길에는 변변한 순례자 숙박시설이나 화장실 하나 제대로 없고, 제주도 올레길 처럼 빼어난 풍광도 없다. 그러나 길을 연지 채 1년도 안된 아름다운 순례길이 벌써 이만여명의 순례자들이 찾는 길이 되었다. 이것은 속으로만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던 대화와 소통의 문화를 이 길을 걸으며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표지이다.
모름지기 문화란 소통과 통합의 원리로 작동되는 한시대의 의식이며 생활양식의 총체이다. 모두가 함께하는 세상을 꿈꾸는 소박한 순례자들이 일구어낸 이 아름다운 순례길이 오랜 세월을 걸쳐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역사적 과정들과 문화적 연륜 만이 아니라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영혼을 깨워'다양성 안의 일치'(Unity in Diversity)를 펼쳐내는, 멋지고 맛깔스런 문화적 비빔밥을 비벼내는 길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김영수(천주교 전주교수 천호성지 관장)
▲ 김영수 관장은 천주교 전주교구 사목국장을 거쳐 천주교 전주교구 천호성지 관장, 아름다운 순례길을 열어가는 (사)한국순례문화원 이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