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44)백제시대 최고(最古)의 석각 무녕왕릉지석

"안정된 자체와 신중한 운필, 최고의 국보"

무녕왕릉지석(525년) (desk@jjan.kr)

 

1972년 6월 29일, 충남 공주읍 금성동 송산리에 소재한 고분군 6기중 제5·6호분의 발굴이 시작되었다. 발굴 7일째 되는 7월 8일, 고분에서 순금왕관과 지석 2편이 발견되었는데 이로써 그 고분이 무녕왕릉이라는 것이 처음 밝혀졌다. 비록 간단하게 기술된 묘지이지만 고분의 주인공과 축조연대를 확인한 삼국시대 유일의 왕릉이 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무녕왕의 이름은 사마(斯摩)이며 모대왕(牟大王 : 東城王)의 둘째아들이다. 신장은 8척이요,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 백성들의 마음이 그에게로 쏠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녕왕은 백제 25대 왕으로서 501년부터 523년까지 재위하였으며, 재위시절 남조 양(梁)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웅진시대를 이끈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집권 말기인 21년 11월에 강성해진 고구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사신을 통해 양나라에 도움을 청하는 장문의 표문을 올렸으나 양 고조가 이를 묵살하자 후에 조공을 단절하였다. 조공을 받은 양 고조는 그 해 12월 무녕왕을 '使持節, 都督 百濟 諸軍事, 寧東大將軍'으로 봉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그리고 재위 23년 여름 5월에 왕이 죽었으며, 시호를 무녕(武寧)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발견된 두 개의 묘지명은 무녕왕과 왕후의 것으로서 백제시대 최고의 석각문이다. 묘지명의 기록을 살펴보면,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 나이 62세 계묘년(523) 5월 7일에 붕어하시어 을사년(525) 8월 12일에 대묘에 모셨다. 묘지명의 세운 것도 좌와 같다."라고 하였다. 묘지에 보이는 '영동대장군'은 앞서 양 고조에게 받은 명호이며, 삼국사기와 달리 무녕왕의 이름이 斯摩가 아닌 斯麻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아울러 무녕왕의 출생연도를 따져볼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데, 「삼국사기」 보다 묘지의 기록이 우선한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는 매우 크다.

 

한편 지석 위에서 오수전(五銖錢) 꾸러미가 함께 발견되었는데, 묘지명의 뒷면에 토지신에게 묘지로 사용할 땅을 매입한다는 문장이 새겨져 있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일명 매지권(買地券)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최근(2007.9) 일본 히로시마대학의 시라스 죠신(白須淨眞) 교수는 묘지에 뚫려 있는 작은 구멍이 이 돈꾸러미를 끼웠던 흔적이라는 것과 또 묘지명 뒷면에 새겨진 십이간지 방위표에서 서쪽에 해당하는 간지가 없는 것은 묘지부지로 서쪽 땅을 샀기 때문이라는 설을 제기하여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동안 의문시되었던 백제 묘지명의 형식을 해소하는 연구성과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추론은 불교에서 사후 세계를 서방정토로 인식하는 것으로 비추어 볼 때 타당성이 높다. 왕과 왕비가 사망한 후 빈전에서 3년 정도 장사를 치른 후 다시 천장(遷葬)한 관례로 보아 당시 장사에서 불교의 논리보다는 도교적인 관습이 내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하여 발견된 묘지명이 과연 묘지인가 아니면 매지권인가 하는 논란이 일었다. 이것은 천장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묘지명이라는 역사적 사실 이면에 매지권을 기입함으로써 묘지의 신성함을 아울러 표시한 것이 아닌가 한다.

 

발굴된 묘지명을 최초로 탁본을 한 금석연구가 황수영 씨는 그 감회를 상세히 밝혔는데 서체와 관련된 부분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체는 사택비보다도 중국 육조체다운 웅건한 풍운이 풍기는 필치로 되어 있었다. 안정된 자체와 신중한 운필 등은 백제미술의 공통적 기질인 온화한 작풍이 느껴졌다. (중략) 이 돌에 새겨진 6행 52자의 글씨(서예)야말로 그대로 최고의 국보요, 큰 자랑이기 때문이다."

 

/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