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제지는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규모의 경제에 걸맞는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고 출발했기 때문에 가동 첫 해부터 신문용지 시장에 돌풍을 예고했다. 가동 첫 해인 1968년 당시 경쟁사들의 생산 능력이 1일 45톤에 불과한 반면 전주제지의 생산능력은 130톤에 달했다. 10월1일 첫 가동한 전주제지의 68년 생산량은 5524톤이었는데, 이는 그 해 고려제지의 연간 생산량 2만880톤의 26%에 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주제지가 헤쳐나가야 할 장애물은 많았다. 거대한 제지공장을 짓는데 들어간 자본의 상당 부분이 외국에서 들여온 대규모 차관이었고, 제지시장의 경쟁도 치열했다.
▲ 어려운 출발
1960년대 1·2차 경제개발이 진행되면서 국내 경제가 크게 성장하고, 이 과정에서 많은 투자가 이뤄졌다. 많은 차관을 들여 설립한 전주제지도 그 산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정부가 급성장 기조에 제동을 걸고, 1970년대 들어 석유파동까지 겹치면서 전주제지도 큰 시련을 겪어야 했다.
정부는 1969년 11월 재정긴축과 유동성 규제를 골자로 하는 '안정기조 구축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이 조치로 인해 69년 15.9%였던 경제성장률이 70년 8.9%로 반토막났다.
제지업계도 국제 펄프 파동으로 원가가 상승, 원료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 1970년 6월 반표백 크라프트 펄프(SKP) 가격은 전년대비 30% 이상 상승한 톤당 205달러에 달했다.
또 정부가 산업비림제 운용방식을 변경하는 바람에 원목 조달도 힘들어졌다. 자연히 원목값도 불안했다.
수입 증가도 문제였다. 1969년 6638톤까지 감소했던 신문용지 수입량이 1970년에는 1만 2782톤으로 급증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국내업체들은 엄청난 출혈경쟁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신문용지 생산업체 4개사 중 전주제지를 제외한 고려·대한·삼풍제지가 법정관리 또는 은행 관리에 들어가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전주제지도 서독 상업차관 800만 마르크, 미국 FNCB의 현금차관 240만 달러, 한국외환은행 대부금 220만 달러를 1969년부터 상환해야 했다. 더구나 2호기 생산이 3개월이나 늦어지면서 적자폭은 늘어났다. 결국 단기 고리의 사채로 버텨야 했다.
이 당시 전주제지의 손익 상황을 살펴보면 1969년 21억 4200만원 매출에 당기순이익 -7367만원, 1970년 34억 1000만원 매출에 당기순이익 338만원, 1971년 37억 8700만원 매출에 당기순익은 -9917만원이었다. 3년간 누적 적자액이 1억6946만원에 달했다.
▲ 신문용지 시장 안착
이런 가운데 전주제지가 1969년 국내 신문용지의 35.4%를 생산하고, 35.3%의 시장점유율을 보인 것은 생존할 수 있는 힘이 됐다.
하지만 전주제지는 2호기에서 생산한 인쇄용지 시장에서 실패했다. 69년 생산량의 76%에 불과한 5267톤 판매에 그친 것. 결국 전주제지는 1970년 4월부터 2호기 생산 지종을 판매가 용이하고 자금 회전이 빠른 신문용지로 전면 변경했다. 이에따라 전주제지의 1970년 신문용지 생산량은 3366톤으로 국내 생산량의 43%에 달했다. 값비싼 화학펄프 대신 값싼 기계펄프를 사용하기 때문에 원가도 절감됐다. 1969년 전체 원료비에서 수입펄프 비중이 66.3%였지만, 지종 변경 후인 1971년에는 47.6%로 떨어졌다. 당시 수입펄프가격은 3년간 53.2% 상승했다.
2호기 지종을 신문용지로 변경한 것은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 시의적절한 판단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전주제지가 인쇄용지 시장에서 뒤쳐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주제지는 1968년 11월, 정부의 자본시장육성에 관한 법률 제정에 따라 삼성그룹 최초로 기업 공개에 나섰지만 회사 수지가 악화되면서 상장을 거부당했다. 이후 1972년 5월17일 증권시장에 상장했고, 당시 주식은 주당 액면가 1000원이었다. 발행 규모는 보통주 119만 9996주와 우선주 30만주였다.
기업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1969년 3억 5000만원, 1970년 2억원, 1971년 9990만원을 증자, 1971년 현재 자기자본비율을 26.1%로 끌어올렸다. 또 전환사채 발행, 산업은행 차입 등을 통해 1970년말 7억3900만원이었던 사채를 1971년 말 3억7700만원 수준으로 낮췄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1972년 '8.3긴급경제조치'를 발표, 기업의 사채동결 및 대폭적인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경제 전반에 걸친 호황은 제지업계에도 파급됐다. 전주제지의 생산량은 1972년 5만9383톤(56.2%)에서 1974년 6만1388톤(41.2$)으로 크게 늘었다. 신문용지 가격도 올랐다. 1965년 연평균 8.8% 인상돼 왔던 신문용지 가격이 1972년 4월 16%나 인상되면서 제지업계의 경영 여건을 크게 호전시켰다.
전주제지는 주거래선인 신문사와 출판업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1972년과 1973년 각각 56%와 52%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하는 등 비약적인 성장을 보였다.
▲ 흑자 시대
1972년부터 1974년에 이르는 기간에 전주제지는 흑자경영으로 돌아섰다. 1972년 당기순이익이 3억6664만원에 달했고, 73년 5억4426만원, 74년 7억3161만원이었다. 1969년 401%까지 치솟았던 부채비율도 1973년 141%로 낮아졌다. 유동성비율도 71년 63.7%에서 73년 140.6%로 개선되는 등 재무구조가 크게 안정됐다.
이처럼 재무구조가 안정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힘이 컸다. 8.3조치에 따라 전주제지는 2억8500만원의 사채잔액을 신고했고, 3억3456만원의 은행채 금리도 21.6%에서 8%로 낮출 수 있었다. 게다가 3년거치 5년 분할 상환의 장기 저리 조건이었다.
이에따라 전주제지가 얻은 비용 절감효과는 연간 1억7만원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