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택지적비는 일제강점기인 1937년, '내선일체'를 내세운 일본인들이 부여 부소산 일대에 신궁을 조성하면서 도로에 깔 석재들을 수습해 쌓아놓았는데, 1948년 부여를 탐방하던 황수영 씨가 관북리 도로변 돌무지에서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화강암으로 높이 102cm, 폭 37.9cm, 두께 29cm로 전면에는 1변이 7cm인 정방형의 정간선을 치고 그 안에 글자를 음각하였다. 1행 14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4행까지 56자가 판독되었다. 이후에도 명문이 있으나 5행부터 반듯하게 잘려나가 알 수 없다. 다만 발견된 석비의 전면 글자가 거의 온전한 상태이기 때문에 판독한 글자를 토대로 대략 그 내용을 엿볼 수 있음은 그나마 다행이다. 비의 좌측면(비의 입장)에는 원 안에 봉황을 새기고 붉은 색을 칠해 놓은 것이 보인다.
우선 판독된 명문의 내용은 이렇다.
"갑인년(甲寅年) 정월 9일 내지성(奈祇城)의 사택지적은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이 어렵사리 돌아오는 것을 슬퍼하여, 금을 캐어 진당(珍堂)을 짓고 옥을 캐어 보탑(寶塔)을 세우니, 그 웅장하고 자애로운 모습은 신비로운 빛을 발하여 구름을 보내고, 그 우뚝하고 자비로운 모습은 성스런 빛을 머금어…"(甲寅年正月九日奈祇城砂宅智積, 慷身日之易往; 慨體月之難還, 穿金以建珍堂: 鑿玉以立寶塔, 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 峨峨悲, 含聖明以…)
한문에서 운율을 느낄 수 있도록 대구(對句) 형식의 문장을 사용하고 있다. 이 문장을 사륙변려체의 형식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대구를 중시한 조밀한 문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기에서 백제시대 금석문의 문학성을 편린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
비문 첫머리의 갑인년은 그 자체로는 연도를 추정할 수 없으나, 비의 주체인 사택지적이 의장왕 때의 인물이라는 것이 확인되어 의자왕 14년, 즉 654년으로 산정하였다. 그 다음에 나오는 '柰祇城' 세 글자는 부여를 사비성으로 지칭하는 것과 달리 새로운 지명이 등장하여 역사학계의 눈길을 끌었다. 사택지적의 출신지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 내지성에 대해서는 부여 인근의 은산(恩山)과 매라(邁羅)가 지목되기도 했지만 아직 정설은 없다. 사비성으로 일컬어지는 부여의 또 다른 명칭이거나 혹은 부여에 소속된 인근지역의 명칭일 것이다. 그것은 비의 주체인 사택지적의 지위가 당시 제2인자인 좌평(佐平)임을 감안한다면 그의 출신지는 적어도 그에 걸맞는 상징적인 지명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미스테리가 있다. 지적(智積)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일본서기」 황극기 원년(642) 2월조에 흠명천황을 조문하러 온 사신을 통해 "지난해 11월 대좌평 지적이 졸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같은 해 7월조에 다시 "백제 사신 대좌평 지적 등이 (천왕을) 배알했다." "백제사신 대좌평 지적과 그 아들인 달솔(達率), 은솔(恩率)인 군선(軍善)이 왔다."는 기록이 있어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김태식(연합신문)은 미륵사지 출토 사리봉안기에 보이는 '좌평 사탁적덕'이 일본서기에서 641년 11월에 죽었다고 말한 '대좌평 사택지덕'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후 명문에서 세월이 쉬이 감을 슬퍼하며 진당을 짓고 보탑을 세웠는데, 신비로운 빛을 발하고 성스런 빛을 머금었다는 표현은 불교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런데 비의 좌측에 보이는 봉황무늬가 범상치 않다. 백제대향로의 봉황을 연상케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택지적은 불교보다는 장생불사를 염원하는 도교적 신선사상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비문의 서체는 단아한 해서로서 강한 골기가 엿보인다. 남북조시대의 금석에서 보이는 해서의 특징을 엿볼 수 있으며, 전형을 이루는 당해보다는 훨씬 소박한 결구를 지니고 있다. 귀중한 백제사료의 하나이자 유일한 백제 석비라는 점에서 서예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