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대] 국치일(國恥日) - 장세균

다가오는 8월 29일은 우리가 일본에게 나라를 완전히 빼앗긴 수치(羞恥)의 날이 기도 하다. 국권을 다시 회복한 광복절과 더불어 국권을 상실케한 '한일 합방조약'의 날인 1910년 8월 29일도 국치일로써 기념해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상해 임시정부도 3.1 기념일과 더불어 국치일도 함께 기념했다.

 

국권 상실의 날을 기념코자 하는것은 치욕의 날을 다시는 가져서는 안된다는 자각 때문이다. 역사는 되풀이 될 수 있기에 더욱 그렇다. 한일 합방조약의 근거는 그 당시 5년전에 이미 일본과 맺어진 '을사보호조약'에 있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기세를 몰아 조선을 병탄하기 위해 1905년 11월 9일 '일본의 특명 전권대사'인 이토 히로부미는 의기 양양하게 서울에 도착하여 다음날 고종황제에게 일본 왕의 친서를 전달한다. 그 친서내용이 오만방자 하다.

 

"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대사를 특파하노니 하나같이 복종하여 조치하소서"였다. 그 당시 일본 공사와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는 경운궁에 일본군을 투입하여 황궁을 포위함으로써 공포감을 조성하였다. 이토가 고종 황제에게 조약승인을 강요했으나 고종은 교묘하게 조약승인을 거부하였다.

 

이에 다급해진 '이토'는 '경운궁'에서 어전회의(御前會議)을 열도록 했으나 오랜시간이 지나도 결론이 나지 않자 '이토'는 일본군 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수십명의 일본헌병 호위속에 직접 대궐로 들어가 노골적으로 대신들을 모욕하며 메모 용지에 연필을 들고 대신들에게 조약에 찬성한다는 뜻의 '가(可)'와 반대한다는 뜻의 '부(不)'를 물었다 회의 결과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 대신 민영기, 법무대신 이하영은 조약에 반대표시를 했고 학부대신 이완용, 군무대신 이근택, 내무대신 이지용, 외무대신 박재순,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은 모든 책임을 고종황제에게 떠넘기고 찬성표시를 했다.

 

조약에 이렇게 찬성한 사람을 가르켜 우리는 을사년(乙巳年 )에 일어났기에 '을사 5적'이라 한다. 이 매국적인 조약협정에 반대하여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었다. 을사보호조약이 결국 5년후에 한일합방조약의 예고편이 되고 말었다.

 

/장세균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