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신문기사를 읽다가 진채선 명창에 관한 글을 봤습니다. 선운사 풍천 장어를 소개한 글이었는데, 말미에 진채선 명창 얘기가 나왔어요.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뒤 진 명창이 3년상을 지키고 홀연히 사라졌다는 짧은 이야기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시절의 명창이라고 하면 전부 남자였는데, 그 벽을 넘고 명창이 되고, 대원군의 총애까지 입었다는 게 범상치가 않았어요."
장편소설 「진채선」(밝은 세상)을 펴낸 소설가 이정규씨(55). 부산 출생인 그는 전직 신문기자였다. 경향신문, 일요신문 기자로 활동하다가 1994년 소설을 써보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전업작가로 뛰어들었다. 소설 「초록빛 모자의 천사」, 「바다 위의 피아노」, 「너는 사랑이다」 등을 펴낸 그는 책이 얼마나 많이 팔리느냐에 구애받지 않고 쓰고 싶은 글을 써왔다고 했다. 「진채선」을 쓸 때만 해도 판소리에 관한 지식은 거의 없었다. 영화 '서편제'를 보면서 '소리를 저렇게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구나'라고 감탄한 게 전부. 일단 판소리를 잘 알려면 귀가 트여야 했고, 판소리 이론도 꿰뚫고 있어야 했다.
"귀가 깨여야 해서 안숙선 김소희 명창의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귀가 열려야 소리를 듣고 육화시킬 수 있으니까요. 이론 공부를 외면하면, 글쓰는 입장에서 탄탄한 이야기를 써낼 수도 없지요. 그래서 어려운 겁니다."
최초의 여류 명창 진채선은 1847년 고창에서 무당의 딸로 태어났다. 고창 관아 기생이었던 채선은 소리를 배우다가 신재효를 만났다. 신재효는 채선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를 거두어 소리를 가르쳤고, 그 과정에서 애정이 싹텄다. 채선은 신재효보다 서른 다섯 살이나 아래였지만 그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책엔 남자 소리의 세계에서 남다른 재능과 노력으로 조선 최고 명창 대열에 선 채선과 그녀를 사랑했던 대원군, 판소리 대부 신재효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졌다. 서로를 그리워하고 사랑했지만, 이뤄질 수 없었던 채선과 신재효, 한 여자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했던 대원군의 이야기다.
"진채선 명창은 사회의 벽을 뛰어넘은 분인데, 너무 초라하게 대접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신재효 선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우리나라로 치면 한국의 세익스피어에요. 세익스피어를 영국 사람들은 얼마나 떠받듭니까. 앞으로도 이같이 숨겨진 명창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