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전에 멀리서 온 손님들이 한옥마을을 꼭 둘러보겠다고 보채는 바람에 동행하게 되었다. 한여름 더위에 여기저기를 둘러 분 후 잠시 목을 축일 곳을 찾고 있는데 간판도 없는 이층집에 젊은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간판이라도 걸려있어야 할 텐데 혹시나 해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는 큰 찻집이었다. 찻값을 치루고 나오는 길에 주인에게 왜 간판이 없냐고 물으니 "아는 사람들이 오면 되지요."라며 말없이 웃기만 했다. 소위 '자기PR시대'에 어디서 나오는 배짱일까?
사람들이 찾는 유원지나 음식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들렀다가 건물보다 더 큰 간판들이 거리를 점령하고 가게마다 손님을 잡아들이기 위해 서있는 호객꾼들의 성화에 놀라 발길을 돌릴 때가 많다. '원조'와 '진짜'를 외치며 경쟁적으로 더욱 커지고 요란스러워지는 간판들을 보노라면 그 천박스러움의 끝이 어디인지 궁금하다.
한 사회의 문화수준은 간판이나 광고에서 잘 볼 수 있다. 시민의식이 덜 성숙된 사회일수록 광고는 일방적이고 직접적인 노출을 보이게 마련이다. 지금 길거리에 난무하는 현수막과 간판의 모습은 우리사회 전체가 얼마나 심한 노출증에 중독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시골길을 달리다보면 '000 씨 아들 과장승진'을 자랑하는 현수막에서부터 육두문자를 험악하게 내뱉어놓은 엽기적인 현수막들이 산천을 도배하고 있다. 공공건물뿐만 아니라 깊은 산골의 사찰이나 성당, 교회 벽에도 온갖 구호를 담은 현수막이 일 년 내 걸려있다. 지자체에서 실시하는 행사나 홍보내용을 담은 광고물이 나이트클럽에서 몰래 내다붙인 불법 현수막과 함께 길거리에 나뒹굴고 있다. 선거철이면 이 모든 노출광고가 총동원되어 거리는 유치원에서나 보는 구호와 율동으로 넘쳐난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불리던 이 사회를 뒤 흔들고 있는 요란스럽고 천박한 자기PR의 작태를 바라보노라면 숨이 막힌다.
언제부터, 우리사회가 자기 안에 내재되어 간직해야 할 것들을 이렇게 여과 없이 노출하는 일에 익숙해져 버렸는가? 노출심리는 자신을 외부에 노출함으로써 자신감을 과시하고 매력을 방출하고자하는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겁 많은 개가 요란스럽게 짓듯이, 열등감이 심한사람이나 심리적인 강박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과장하여 과시하려는 노출욕구를 가지게 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진정성이 없는 사람일수록 외적인 노출에 병적으로 집착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노출중독은 자기PR을 넘어서 과히 병적인 수준이다.
문화는 천년지대계이다. 문화란 시대의 유행을 경박하게 쏟아내는 일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진정성을 담아내는 큰 그릇이 되어야한다. 전라북도에 들어오는 나들목에 기와지붕위에 앉아 손을 흔들며 '5,000만 마음의 고향 전북'을 알리는 소년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멀리서 한옥마을을 찾은 사람들은 거리의 아기자기함에 웃음을 머금는다. 그러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벤트성 행사나 옛것을 꾸며 전시해 놓은 거리가 아닌 고향의 정서를 만날 수 없음을 아쉬워한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고즈넉이 삶의 진솔함을 나누는 고향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이 고장이 전통문화의 고향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요란스런 자기노출을 통해서가 아니라 천년을 내다보며 소리 내지 않고 흐르는 넓고 깊은 물처럼 우리가 지닌 삶의 진정성이 유유히 흐흐는 깊은 문화의 강을 만들어 내는 안목을 키워가야 한다.
'바닥이 얕은 물은 소리를 내고 흐르지만 깊고 넓은 큰 바다의 물은 소리를 내지 않고 흐른다. 부족한 것은 시끄럽지만 가득한 것은 조용하다.' (마하바가)
/ 김영수 (천주교 전주교구 천호성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