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이 안정된 1970∼1980년대 기간에 전주제지는 세계시장 진출을 준비했다. 규모의 생산체계 구축과 병행, 안정 성장을 위한 기업의 체질 개선도 진행시켰다.
1977년 3호기 가동과 더불어 생산능력 2.1배, 인력 1.4배, 자산 3.1배가 증가하는 등 모든 부문이 급격히 팽창,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관리기법이 요구되자 1978년 9월 한국과학기술원과 생산 관리 및 기계부품 관리의 전산화 용역 계약을 체결,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1979년 11월에는 삼성물산으로부터 컴퓨터를 임차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제지업계 최초의 업무 전산화였다.
▲ 제지업계 최초 업무 전산화
1980년 3월에 전산팀을 발족하고, 그해 7월에는 휴렛 팩커드(HP)사의 컴퓨터 HP-3000-33(용량 0.5MB)을 도입했다. 이에따라 자재 및 생산관리를 전산처리하게 됐고, 이어 인사 및 회계관리 시스템도 개발했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1978년 6월1일 목표관리제, 1979년 10월 사업부제가 채택됐다. 그러나 목표관리제도는 조직단위로 실시돼 개인의 목표의식을 높이는데 한계가 있어 개인을 하나의 사업부 단위로 설정하는 개인별사업부제를 1985년 3월15일부터 실시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실적 향상에는 효과를 발휘했지만 개인주의 만연과 경영관리자의 창의력을 저해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에 작업표준을 설정하고 과거 실적에 의한 목표 부여와 인센티브제 도입, 부서별 평가기준의 차별화 등을 실시하며 개선해 나갔다.
1989년에는 대표이사 직속기구로 경영합리화추진본부를 설치하고, TPI(Total Productivity Innovation)라는 종합생산혁신운동을 전개했다.
영업전략도 강화했다. 경쟁사에 비해 공급량이 열세인 신문사에 대해서는 가격할인, 외상기일 연장 등 당근을 제시하며 점유율을 높여갔고, 1986년에는 서울지역 대리점들을 한데 묶어 거목회를 조직, 가동했다.
▲ 원료의 안정적 수급 노력
제지산업은 전형적인 장치산업으로 원료 조달 비용을 낮춰야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전주제지는 원목의 안정적 수급을 위해 1989년 7월에 원목 공급업체를 하나로 묶은 송우회(松友會)를 발족했다. 송우회는 1989년 3465만재, 1991년 4891만재의 원목을 공급하는 등 전주제지의 원목 수급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1971년부터 주요 원료로 사용해 온 고지의 안정적 확보에도 힘썼다. 1986년 15만2000톤, 1990년 37만4000톤 등 매년 고지 수입량이 늘어나자 1984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첫 해외지점을 개설하고 고지 및 펄프를 조달했다. 이어 1988년에는 캐나다 ETL사와 설립한 합작법인 사무소를 벤쿠버와 뉴욕에 개설했다.
전주제지는 1972년 하루 30톤 생산 규모의 탈묵펄프생산시설을 갖췄고, 3호기가 가동되기 시작한 1977년에는 200톤 생산규모로 증설했다. 4호기 건설이 진행되던 1984년 하루 500톤 생산규모의 탈묵펄프 생산시설을 갖췄는데, 이는 단일공장 세계 최대의 탈묵시설이었다. 이무렵 탈묵펄프 배합비율도 70% 수준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탈묵펄프를 많이 배합하면 신문용지의 백색도가 매우 낮아지는 문제가 있었다. 이 때문에 수출용 신문용지나 교과서 용지를 생산할 때는 탈묵펄프를 25%밖에 배합할 수 없었다.
이에 전주제지는 1986년 표백탈묵펄프를 개발했다. 그 결과 수출용 신문용지의 탈묵펄프 비율이 25%에서 45%까지 높아졌고, 1989년에는 일반신문용지 생산과정에 들어가는 탈묵펄프 비율도 80% 수준까지 향상됐다.
전주제지는 하루 300톤 규모의 쇄목펄프를 생산해 중질지 및 옵셋용지에 65%, 신문용지에 20%의 비율로 배합했지만 쇄목펄프는 강도가 떨어졌다. 그러나 수입 열기계펄프는 쇄목펄프보다 강도가 2배 이상 높고, 자동화가 가능했다. 1988년 12월 캐나다 하이맥사에 설비를 발주, 공사에 들어간 열기계펄프는 1990년 1월부터 정상가동됐다. 이후 3년간 열기계펄프 사용에 따른 원가 절감액은 27∼32억원에 달했다.
▲ 1986년 11월 매출액 1000억 돌파
전주제지는 1986년 11월13일 매출액 1000억원을 돌파하는 쾌거를 이뤘다. 1968년 신문용지를 생산한 이래 총190만톤의 종이를 판매함으로써 일궈낸 성과였다.
경제성장에 따라 국가 전반에 걸친 문화수준이 향상되면서 종이 수요가 급격히 증가한 것은 물론 고가의 인쇄용지 수요도 크게 늘난 점, 신문시장 팽창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제지공업연합회 자료에 따르면 국내 신문용지 생산량은 1986년 27만2000여톤에 불과했지만, 87년 30만2000여톤, 88년 36만8000여톤, 89년 44만4000여톤, 1990년 52만1000여톤 등 87년을 기점으로 큰 폭으로 증가했다.
▲ 5호기 증설
1987년 6.29선언에 의한 언론자유화 조치 등 요인으로 언론산업이 팽창, 신문용지 자급이 무너졌다. 87년 당시 국내 일간신문은 30개에 불과했으나 89년 12월에 68개로 늘어났다. 면수도 87년 12면에서 90년 24면으로 증가했다. 이에따라 88년 31만 7000톤이던 신문용지 수요는 1992년 67만 7000톤으로 급증했다. 이 때문에 1990년에 4만312톤을 수입할 만큼 신문용지 공급 부족이 심화됐다.
이에 전주제지는 국제경쟁력을 갖춘 5호기 증설을 추진하는 동시에 증설 후 공급과잉을 예상, 수출 거래선 확보에도 나섰다. 홍콩 호주 등을 중심으로 신문용지 수출 거래선을 확보한 전주제지는 1987년 11월 무역의날 행사에서 1000만불 수출탑을 수상했다.
전주공단 내에 5호기를 설치하기로 한 전주제지는 3만2000평의 부지를 추가로 매입하고 투자비 1113억원을 확보하기 위해 유상증자(51억9000만원) 실시, 회사채(150억원) 발행, KDB시설자금(470억원) 등 내자 745억원을 조달했다. 또 외자 368억원을 도입했다. 전주제지는 1997년까지 보유해야 할 생산능력을 65만9000톤으로 추산하고 5호기의 제원을 지폭 5폭, 운전속도 1100m/분, 생산능력 하루 590톤으로 결정했다.
1988년 4월 기공된 5호기(미쓰비시중공업) 증설공사는 이듬해 9월1일 준공됐다. 이 과정에서 제2호 열병합발전소와 열기계펄프 설비도 건설됐다. 이에따라 전주제지의 연간 생산량은 30만톤에서 50만톤 규모로 성장했고, 그동안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열기계펄프 생산시설을 국내 최초로 갖춰 원가도 크게 절감됐다.
▲ 정보산업용지 시장 진출
1980년대 중반 이후 정보산업 분야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복사기와 팩스, 컴퓨터, 프린터 등 정보기기가 산업현장과 일반에 대량 보급됐다.
전주제지는 1979년 12월 국내 최초로 설립한 제지연구소를 통해 다양한 용도의 종이를 개발해 나갔다. 1981년 중질복사용지를 개발한데 이어 OCR용지, 청사진 원지, 고속 레지저프린터에 사용되는 비충격 방식의 NIP(Non Impact Printer)용지 등을 개발해 생산했다.
이어 1986년 팩스에 사용하는 감열지(무색 염료인 로이코 염료와 현색제가 만나 열에 의해 반응함으로써 발색(發色)하는 특수지) 개발에 들어간 전주제지는 1987년 4월 공사에 들어가 1988년 5월 생산에 들어갔다. 그러나 기술적 어려움으로 제품을 시장에 내놓지 못했고, 1989년 10월에 이르러서야 '스타팩스'라는 상표로 판매에 들어갔다. 전주제지의 감열지 개발 생산은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 번째 였다.
이후 1989년 불연무기질종이 개발, 1990년 흑백 및 컬러잉크젯용지 국산화, 1991년 열전사용지, 고감도 감열지, 바이오펄핑기술, 무진지(無塵地) 등을 잇따라 개발했다. 미립자 발생이 적고 불투명성 및 내열성을 갖춘 무진지 개발은 세계 세 번째 쾌거였다.
한편 전주제지는 기업이미지 변신을 통해 세계 일류기업으로 성장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1986년 창립 21주년을 맞아 새로운 심벌마크와 로고를 제정,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