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각자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자기 지역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 곳을 사랑하고 애착을 지니고 산다. 그 바탕에는 자기를 있게 한 부모와 형제, 자매가 있고 어렸을 때의 친구와 자라면서 갖게 된 기쁘고 슬픈 추억들 때문일 것이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고조부 때부터 전주 가련산 일대에 터를 두고 살아온 전주토박이이다. 젊었던 시절 군대와 직장으로 10여년을 객지와 외국에서 살았지만 30대 후반에 다시 전주에 터를 잡고 살고 있다.
한 인간으로써 넓은 세상도 구경하고 그 속에서 젊은 시절 한때 외국인들과 섞여 일도 하였고, 또 조상들의 생활터전이면서 그들이 묻혀있는 이곳 전주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으니 삶의 터전으로 보면 행복한 삶이다. 그래서인지 내 고향 전주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한벽청연, 덕진채연이 그렇고, 남고모종, 다가사후가 그렇고, 기린토월 어느 하나 애잔한 추억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런데 아쉬움이 있다. "전주한옥마을"이라는 신조어이다. 전주도 알겠고 한옥마을도 알겠는데 전주한옥마을이다. 물론 이유야 충분히 있겠지만 우리가 전주한옥마을이라 경계를 짓고, 알고 있는 지역은 1392년부터 고유한 명칭이 있었다.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강탈한 일제는 그 흔적조차 지우기 위해 그곳에 중앙초등학교를 세우고 일본인들은 자기식의 전통 가옥을 짓고 집단적으로 모여 살았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한술 더 떠서 그곳을 한옥마을이라고 스스로 미시적으로 한정을 지어 이름을 정하였으니, 일제가 물리적으로 훼손하였다면 우리는 정신적으로 우리를 가두어 놓은 형국이다.
719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京畿田의 京이라는 글자는 天子가 도읍한 지역이라는 뜻이고, 畿는 궁·성을 중심으로 주변 500리를 뜻하는 말이다. 역사적으로는 중원의 당나라 때에 사용되었고 고려의 성종, 현종 때에 개경을 중심으로 주변에 경기라는 현을 두었다. 물론 조선의 궁성이 있던 한성 주변 역시 경기지역이었다. 경기지역은 궁성을 외적으로부터 지키고 궁성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고 궁성에서 소요되는 인력을 지원했던 역할을 했다.
京畿田은 우주의 중심이 된 경기의 터전이 된 곳이다. 즉, 왕조의 발상지인 것이다. 그래서 조선건국 태조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가 살았던 집터 이목대(梨木臺) 주변을 조선창건해인 1392년에 京畿田이 된 것이다.
조선 3대 왕인 태종(이방원)이 1410년 전주와, 경주, 평양에 어용전을 짓고 각각 전각의 이름을 달리 지어 정하였는데 전주의 어용전이 慶基殿이었다.
묘하게 한자의 발음이 경기전이라 같아서 지금까지 경기전하면 물리적 실체를 갖고 있는 어용전을 기억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2010년 8월 29일이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날이다. 우리는 일제의 사죄도 받고 역사적 과오도 정리하여야 한다. 하지만 스스로 우리를 존중하고 우리의 가치를 인정하고 우리의 역사를 규명하고 가꾸어야 함이 먼저일 것이다.
전주에는 719년이 된 京畿田이 있으며 그 곳에 우리의 전통과 역사를 잘 지니고 있는 慶基殿이 있고 이목대, 오목대가 있고 전주향교, 조경묘와 많은 한옥들이 있어 오늘날 전주시민과 한민족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사랑받기 충분하다.
세계에 단 하나 뿐인 전주 京畿田에 우리의 마음을 담고, 우리의 역사를 담고 우리 민족 자존심을 담아내어야 한다. 이곳이 단순히 관광지가 되어서 안되는 이유이며 한옥마을이라 스스로 좁게 가두어서도 안되는 이유이다
조선왕조, 대한제국의 태동의 중심이고 한민족의 상징적 성지인 京畿田을 우리는 다시 생각하고 이어가야 할 것이다.
비오는 날 저녁 오목대에 올라 719년을 거슬러 9000여년의 한민족 역사의 맥을 잇고 있는 京畿田을 둘러보고 싶다. 그곳에 한민족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 송경규(사단법인 황실문화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