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행복을 느끼는 정답을 있을까

김형중(원광보건대학 교수)

가파르고 메마른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은 현실의 무게를 견뎌내기 힘들 때마다 소망한다. 원칙이 상식화 된 세상, 인간에 대한 존중이 살아있는 세상, 금력과 권력의 끈에 휩쓸리지 않는 세상을 간절하게 기대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 부를 축적한 사람들, 그리고 명예를 걸머진 사람들이 떳떳하고 부끄럽지 않은 세상이 되어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웃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상식적인 언행과 질서를 지키는 행동이 바보짓으로 보이는 풍조가 사라지고, 긍정적인 가치관과 소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져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픈 꿈은 어딘가에서 우리를 조롱하듯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의 역동성을 잃어가는 세상, 추구해야 할 지향점이 사라져 가는 세상에서 모든 것들을 내던져 버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엉망일지라도 순수한 영혼을 일상생활에서 지키려는 더 많은 사람들의 웃음이 있기에 우리 사회는 비틀거리면서도 넘어지지 않는 것 아닐까.

 

흔히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는 '닭의 벼슬과 달걀의 노른자'로 닭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사회 지도층들의 도덕적 윤리관에 비유한다. 이 사회로부터 진정한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노블리스)을 사회와 이웃을 위해 베풀고 살아가는 (오블리제) 것이다.

 

작가 알랭드 보통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반드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강박관념'이라고 했다. 살아 있을 때보다 죽은 뒤 더 유명해진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좌절ㆍ불안ㆍ절망ㆍ슬픔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욕망의 한 형태이며, 따라서 생의 에너지라고 했다. 그는 논문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인간의 삶을 세 단계로 나눴다.

 

1단계에서는 인간이 쾌락만을 찾는데 이것만으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권태다. 2단계는 윤리적 단계인데, 이 역시 삶의 유한성 때문에 근본적인 생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세 번째 삶의 완전한 단계는 종교적 단계라고 했다. 인간이 스스로의 내면적 결심에 따라 진정 신을 믿고 따를 때 삶에 대한 무력감과 허망함을 떨쳐 버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무조건 신을 따르라는 주장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관계와 인간 내면의 본질에 천착해 신을 보는 관점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리면서 사상사에 큰 공을 세웠다.

 

사람들이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어떤 고비라도 넘어갈 수 있는 용기가 있고, 한계의 벽을 오를 수 있는 파란 꿈이 있기 때문이며, 그 속에서 짜릿한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다.

 

우리들의 삶에서 불안과 좌절과 슬픔의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순진한 자기 자신의 결단에 따른 것이다. 즉 삶이 가져다 주는 고달픔과 힘겨움은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해지는데, 달리 생각해보면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자신을 사랑하면서, 좀 어렵지만 작은 것에서부터 만족을 배워가며 새로운 경지를 열어가는 긍정의 힘으로 오늘을 개척해 나갈 때 행운의 여신이 나를 향해 손짓하지 않을까.

 

행복을 느끼는 삶의 정답은 각자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정답은 각자의 생각에 머무를 것이다.

 

/ 김형중(원광보건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