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57) 마운령 진흥왕순수비

신라 세력확장 증명한 귀중한 자료

마운령 진흥왕순수비는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사동 만덕산 복흥사 뒤의 운시산(일명 운무산) 정상에 있었다고 전한다. 비신과 개석이 분리되어 계곡에 흩어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좌대를 설치하고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하였다. 비의 형태가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음은 다행이다. 마운령비에 대한 기록은 역시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고, 조선시대에 들어서 비로소 보인다. 한백겸(韓百謙, 1552-1615)의 「동국지리지」에 "고원(高原)은 정천군(井泉郡)인데 함흥황초령 및 단천에 또한 순수비가 있으니, 동옥저 또한 당시에 신라의 영토였음을 알 수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사는 「동국문헌비고」에 그대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후에는 마운령 진흥왕순수비의 행방이 묘연해져 다시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것을 증명하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여지고」를 편찬했던 실학자 신경준(申景濬·1712-1781)은 자신의 저서에서 "端川碑文今未及考"라 하여 이전의 기록에 대해 증명할 수 없음을 토로하였고, 북한산비와 황초령비의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여 금석학의 체계를 세운 추사 김정희도 마운령 진흥왕순수비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였다.

 

추사는 유명한 「진흥이비고」라는 논고에서 마운령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동국지지(東國地志)에 이르기를 신라 진흥왕이 지금의 안변부를 비렬주로 삼고, 고원(高原)을 정천군(井泉郡)으로 삼았으며, 함흥의 황초령 및 단천(端川)에도 순수비가 있고 보면 옥저도 때로 신라에서 빼앗은 바가 되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상고해보건대, 정천군은 지금의 덕원(德源)이요 고원(高原)이 아니니, 단천에 순수비가 있다는 것은 또한 분명한 증거가 없다." 또 "단천에 진흥왕비가 있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지 못했으니, 단천 이남의 지역이 신라로 꺾여 들어왔다는 것도 틀린 말이다."라고 거듭 부정함으로써 마운령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실증을 중시하는 고증학에서 그때까지 실물을 발견하지 못한 것에 대한 학문적 견해이지만, 그들의 추정과는 달리 마운령비는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다.

 

이후 마운령비를 발견하여 학계에 소개한 사람은 육당 최남선으로 알려져 있다. 발견경위에 대하여 잠시 소개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육당은 姜必東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던 「栗溪浪人徵集」이라는 표제에 「北域建置沿革考」라는 내제(內題)가 붙은 책에서 운무산 정상에 진흥왕순수비가 있다는 기록을 발견하고 실지를 답사하여 비를 발견하였고, 조선사편수회에 발견보고서를 제출함으로써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전에 발견된 진흥왕 순수비의 형식과 내용이 대체로 일치하여 상호보완을 통하여 비의 내용을 추정할 수 있다. 석질은 화강암으로 높이 146.5cm, 폭은 44.2cm, 두께 30cm이며, 별도로 덮개와 받침대를 만들었고 마멸이 비교적 심하지 않아 글자를 판독할 수 있다. 비문은 전면(碑陽)과 뒷면(碑陰)에 새겨져 있다. 전면의 첫행에는 비문의 성격을 규명하는 「太昌元年歲次戊子□□卄一日□□□興太王巡狩□□刊石銘記也」라는 제기가 새겨져 있다. 비문 가운데 마멸되어 보이지 않는 부분은 다른 순수비의 내용으로 보충할 수 있으므로, 진흥왕 29년 무자, 즉, 568년 8월 21에 세워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비문의 내용은 여타의 것과 비슷하여, 순수의 당위성과 비의 건립 배경을 기록하고, 아울러 민심의 채방과 포상 약속 등을 기록하였다. 진흥왕은 확장한 영토를 순수하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편입된 지역에 대한 정치적 배려와 안정을 약속함으로써 지지기반을 다지는 계기로 삼고 있다. 이에 진흥왕을 따른 신료들의 관직과 이름을 상세히 기술한 것은 이 때문이다. 신라의 세력확장을 증명하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되며, 육조의 해서풍을 느끼게 하는 서체는 신라서예사 연구에도 중요하다.

 

/ 이은혁(전주대 한문교육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