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강, 생명의 길을 묻다] (17)강과 문학(하)- 소설이 쌓여 흐르는 강

물길 닿는 곳마다 켜켜이 쌓인 '삶의 애환' 담아

김제 죽산면 해창배수갑문 인근 원평천 하구. 주민들이 자그마한 나룻배를 이용, 물고기를 잡고 있다. (desk@jjan.kr)

동진강은 물길 닿은 곳 어디나 소설(小說)이 쌓여 있다. 벽골제와 금산사, 모악산과 내장산, 동학과 일제강점기의 수탈 등 동진강이 안고 흐르는 역사는 모두 소설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동진강은 기억을 거슬러 한민족의 역사를 형상화한 민족지를 일구어 내고 있는 것이다. 동진강을 타고 흐르는 소설들은 이 땅 사람들의 마음을 아련케 하는 힘이 있다.

 

류영국의 장편소설 『만월까지』의 배경은 김제와 부안이 잇댄 김제시 부량면 옥정리 부근. 동진강의 달빛은 궁궐의 마당(玉庭) 같이 밝다.

 

'정작 큰일은 그날 밤 강가에서 벌어졌던 거여. 그놈의 동진강 달빛은 왜 그렇게도 맑어? 낮에 보면 뿌연 갯바닥인디 저녁에 달이 뜨면 은하수 같더라고. 탱자나무집 그 가시내를 생각험서 내가 부는 퉁소 소리에 내가 취혔는디, 느닷없이 청년들이 떼로 몰려오더니 두말헐 것도 없이 눕혀놓고 진흙 반죽을 허드라고, 참.'

 

구한말을 배경으로, 종살이 삼대의 분노와 한으로 얼룩진 삶의 응어리들을 그린 이 소설은 민초들의 끈질기고 건강한 생명이 문장 구절구절 짙게 배어 있다. 묻히고 잊힌 토속어가 감칠맛 나게 풀어져 있으며, 소(牛)부리기, 물꼬 싸움, 베 짜기, 굿판 등 강어귀에 살던 이들의 전통 생활양식과 풍습도 실감나게 그려 있다.

 

일제 강점기 후반과 해방 전·후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 일대 동진강 나루터를 배경으로 한 아동문학가 김용재의 청소년소설 「나루터마을」에도 동진강은 살아 있다. 그는 "동진강은 맑은 물이 흐르기도 했지만 홍수 때는 흙탕물이 범람하여 귀한 생명을 앗아가기도 했고, 서해 바닷물의 조수왕래가 있을 때는 나룻배를 밧줄로 얽매어놓아야 했다"고 기억한다. 나루터마을에는 바닷물이 밀고 온 갯벌에서는 짱뚱어가 뛰어놀고 갈게나 농게들이 춤을 춘다. 갯바람에 서걱서걱 한들거리는 개개비가 노래 부르고, 그 노래를 들으며 나룻배의 뱃사공이 노를 젓는 풍경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 송기숙의 「녹두장군」, 이병천의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 유현종의 「들불」, 채길순의 「동트는 산맥」과 「흰옷이야기」 등 반복되는 수탈과 저항을 동학으로 되살려 낸 소설들과 「전봉준」이란 동명의 이야기를 담은 작가들, 이이화·우윤·안재성·김자환·김삼웅·안도현·조채린·김덕길·이정범·신복룡·김현숙·안세희·김한룡·유인옥·박상재·김향이·김경희·이광열·김원경……. 그리고 정읍이 고향인 손홍규의 소설 「귀신의 시대」, 김제 출신 장종권의 단편소설 「그 여름의 동진강」, 홍종화의 소설 「매창」, 김종광의 「율려낙원국」 등에도 동진강은 유유히 흐른다.

 

 

작가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의 배경이 된 징게맹갱(김제만경)들녘, 김제시 부량면에 들어선 아리랑문학관. 지난 2003년 5월에 개관했다. (desk@jjan.kr)

김원일의 소설 「도요새에 관한 명상」은 주요 배경을 철새들의 도래지인 '동진강'이라고 설정했다. 그러나 소설 속 중부리도요라는 귀한 새가 삼각주에 도래하고 청둥오리와 왜가리, 고니, 원앙이, 농병아리 등 철새들의 터전인 것은 맞지만, '동해남부선의 작은 역이 있는 곳'이나, 오징어잡이배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면 전라도의 동진강은 아니다.

 

동진강 갈래천인 두악산 아래 신평천의 백산저수지(김제 백산면 하정리)는 소설가 윤흥길이 1982년 발표한 소설 「완장」의 무대다. 하지만 작품에 백산저수지라는 지명은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 종술이가 완장을 찬 왼팔을 훨씬 더 활기차게 휘저으면서 갈지자걸음으로 순찰하던 소설 속 '판금저수지'도 지도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공간이다. 작가는 백산저수지 근처에서 과수원을 하던 친구, 지금은 백산저수지 바로 옆에 묻혀 있는 고(故) 이상열 시인으로부터 짤막한 이야기를 듣고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전한다. 소설가 김승옥이 순천만을 '무진'으로 변형시킨 것처럼, 윤흥길은 백산저수지라는 구체적 공간을 판금저수지로 바꾼 것이다.

 

작품에 묘사된 것처럼 백산저수지는 1966년부터 3년간 대대적으로 벌어진 '호남 야산개발' 때 축조된 인공저수지다. 50Km 쯤 떨어진 섬진강 다목적댐에서 물을 끌어와 가두어 두었다가 개간으로 생긴 논에 물을 공급한다. 작가는 종술의 욕망을 희화하기 위해 소설 속 저수지를 실제보다 훨씬 큰 규모의 것으로 과장한다. '감시원 완장 차고 물가상이로 왔다리갔다리 허면서' 막강한 권력자처럼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던 종술. 그에게 완장의 허황됨을 깨우친 것은 술집 작부 부월이의 일침이다.

 

"눈에 뵈는 완장은 기중 벨볼 일 없는 하빠리들이나 차는 게여! 진짜배기 완장은 눈에 뵈지도 않어!… 권력 중에서 아무 실속 없는 놈들이 흘린 뿌시레기나 주워 먹는 핫질 중에 핫질이 바로 완장인 게여!"

 

「완장」은 유장한 강의 흐름처럼 인간의 본성과 역사에 성찰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완장'은 어느 시대나 존재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완장의 나라, 완장에 얽힌 무수한 사연으로 점철된 완장의 역사'를 떠올리며, 완장을 통해 우리 시대의 한 징후를 읽어낸다. 지금 '완장'을 찬 사람은 누구인가. 완장을 차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도록 외면하고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 소설 '갯들' 과 '아리랑'

 

- 수탈의 땅, 뿌리뽑힌 민초들의 이야기

 

 

'광활 갯벌'과 '동진농장'은 일제 강점기 한민족의 시린 역사를 일러주는 대표적인 상징어다.

 

1924년 일제는 김제 동진농장 간척지를 개간하기 위해 방조제 공사를 시작한다. 동시에 간척지의 염기를 제거하고 물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 섬진강을 막아 운암저수지를 만들고, 간척지까지 길고 긴 수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1925년 정월 김제의 광활한 벌판에 이주민들이 밀려들었다.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땅마저 빼앗긴 채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국내·외를 떠돌아야 했던 우리 민족의 애환은 임영춘의 소설 「갯들」과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서 찾을 수 있다.

 

1981년 세상에 낸 「갯들」은 1920년대 후반부터 해방까지 부모가 간척지로 이주해서 살았던 시절의 자전적 이야기다. 배경은 동진농장으로 불리던 간척지 이민촌. 일제가 동진강 하류 갯벌을 개간해 이민을 받아 조성된 김제 광활면이다.

 

'당시 일제는 '손바닥 검사'(손에 괭이가 박히도록 일을 많이 한 사람) 등 신체검사를 통해 소처럼 일을 할 수 있는 소작인을 모집하였다. 그들에게 제공된 것은 바람도 막을 수 없는 움막이 전부였으며,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먹고, 자고, 일하는 것뿐이었다.'(「갯들」中)

 

작가는 시달리다 못해 쓰러지는 어른들을 지켜보았고, 그 스스로도 '개구리와 뱀이 썩은 도랑물을 먹고 굶주림 속에서 죽지 않고 용케 살아났다'고 회고한다. 그 모습은 소설에서 '노예시장에서처럼 쓸 만한 놈을 골라 와야 한단 말이야.', '조선은 우리 식민지야. 마음대로 부려먹어도 좋아.', '말채 같은 단단한 채찍을 만들어서 말 안 듣는 놈은 마구 후려치는 거야.', '요놈(불에 달군 집게)으로 말 안 듣는 놈은 살을 푹푹 지지는 거야.' 등의 표현으로 구체화된다.

 

「아리랑」의 시작은 김제시 죽산면 내촌마을. '들'은 흔하고, '산'이 귀한 곳이다.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넓은 들녘, '징게 맹갱 외에밋들'의 나락들은 조선을 침략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첫 번째 수탈의 대상이다. 작가는 죽산면 자작농과 소작농들의 삶을 통해 일제의 토지 조사사업으로 농촌사회가 파괴되고 농민이 분해되는 모습을 전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영구소작권을 받기 위해 뻘밭을 농토로 만드는 사업에 참여했던 소설 속 한기팔의 한 마디,

 

"참말로 기가 차시. 재주넌 곰이 넘고 돈언 왕서방이 다 묵드라고 요것이 무신 꼴이여. 우리가 그리 피땀 흘리고 골빠지게 일해 갖고 결국 왜놈덜만 조리 존 일 시켰으니, 원퉁히서 못살겄네."

 

생전사후 분하고 억울한 일, 동진강은 안다. 그래서 기차게 흐른다.

 

/최기우(극작가·최명희문학관 기획연구실장)

 

※ 공동기획: 만경강 생태하천가꾸기민관학협의회·정읍의제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