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모 케이블 방송 '비틀즈 코드'라는 오락 프로그램을 매우 재미있게 보고 있다. 서로 다른 스타일의 가수와 그룹의 공통점을 억지로 짜 맞추는 과정(비록 작위적이지만)이 '매우 그럴싸하게(?)'포장되면서 묘한 재미가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이 프로그램에서 내세우는 '평행이론'이 가져다주는 약간의 신비감 때문이 아닐 지 모르겠다.
'다른 시대에 사는 사람이 같은 운명을 반복한다'라는 뜻을 가진 '평행이론'은 아틀란티스를 연구하던 고고학자 '프랭크 마샬(Frank Marshall)'이 100년 전 자신과 같이 아틀란티스를 연구했던 '이구나 치우스'라는 학자와 비슷한 생애를 살았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주장한 학설로부터 출발한다.
미국 대통령 링컨과 케네디의 삶은 '평행이론'의 근거로 종종 제시되며, 몇년 전 우리나라에서는 故 최진실 씨와 마리린 몬노의 생애를 비교하며 '평행이론'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런데 매주 '깔깔' 거리며 보던 이 프로그램을 지난주에는 그렇게 신나게 볼 수만은 없었다. 올해로 40주기를 맞이한 전태일 추모 행사와 관련 기사를 접하면서, 문득 2010년을 살아가는 누군가도 전태일과 같은 삶일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삶일 수 있겠구나'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거나 기본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민주노총의 집계에 따르면, 2000년 이후에만 적어도 20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하청 노동자도 인간인다"며 "사람답게 살고 싶다"며 분신한 이들 하나하나가 '전태일'이다. 그가 일했던 평화시장에서 청소 일을 했던 노동자는 지금도 비정규직으로 건물 청소를 하고 있으며, 그가 일했던 봉제공장에서는 피부색이 다른 이주노동자가 들어서 있다. 이들 역시 또 다른 이름의 '전태일'이다.
시간은 흘렀으되, 여전히 '전태일'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아니 어쩌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는 없는 또 다른 이름의 '전태일'들. 다른 이들의 삶이 반복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 해도, '전태일'이라는 이름으로 '평행이론'이 성립되는 것은 너무도 서글픈 일이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에서 그가 분신한지 40년이 흘렀다. 우리 사회는 조금 더 민주화 되었으며, 우리의 피부는 조금 더 하얗게 변했다. 우리는 훨씬 더 많이 배우게 되었고, 또 우리는 훨씬 더 많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전태일'이라는 세 글자는 살아있음을 부끄럽게 하는 이름 그대로 일까. 친구가 절실했던 전태일. 2010년 '전태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우리 모두 친구가 되자.
/ 박창우(오마이뉴스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