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회갑인데, 너는 무슨 계획을 하고 있느냐?"
93세를 맞은 하반영 화백은 회갑(回甲)을 맞은 며느리 김용옥 시인에게 물었다. 묵묵부답인 김 시인에게 시아버지는 "내가 틈틈이 그림 100점을 그려줄 거여."라고 선언했다.
"나는 니가 시인인 것이 참으로 좋아. 니 시는 철학이고 인생이여. 내 인생에 김용옥 시인을 만난 것이 제일 잘한 일이여."
시인은 '시 나부랭이'가 될까봐 노심초사하며 시를 쟁여두었다. 시아버지의 사랑과 이해를 받는 것만으로도 시인은 질곡의 인생에 만복을 채우는 심정이 됐다. 화시집 「빛·마하·生成」(신아출판사)은 시아버지가 시인에게, 시인이 시아버지에게 바치는 영혼의 선물이다.
이들의 예술은 사랑과 빛의 구현으로 집약된다. 빛은 모든 만물의 근원으로 아파하고 쓰러지는 삶을 일으켜주며 견뎌내게 한다. 책 제목을 '빛·마하(빛의 속도)·生成'로 정한 이유다.
7살부터 서예와 수묵화로 붓을 잡은 하반영 화백은 1931년 13세의 나이로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조선미술전람회'의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프랑스 파리 공모전 금상(1979), 미국 미술평론가협회 공모전 우수상(1987)에 이어 89세 고령의 나이로도 일본의 '이과전'에서 최우수상(2006)을 수상, 그의 붓질은 여전히 그칠 줄 모른다. 2006년 뇌종양 수술 이후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지만, 더욱 왕성한 필력으로 그림에 몰두해온 그는 시인에게 열쇠 그림 '지(智)·력(力)·진(進)'을 선물했다.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지쳤다는 것, 어떤 의욕도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위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막막해하는 나에게 미래의 열쇠를 주고 싶어했던 것이죠. 이 작품으로 세상을 여는 열쇠를 얻었습니다."
화시집에는 실린 작품은 50년대 구상부터 2000년대 초현실주의까지 50여 년간의 궤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풍경, 정물, 비구상 등 강렬한 색채와 구성력이 돋보인다. 냅킨, 답배갑, 일회용 접시 등에도 그의 붓은 생명의 꽃을 피웠다.
"종교는 없지만 그림으로 밥을 먹게 해준 조물주께 항상 감사하다."
그가 입버릇처럼 해왔던 말을 떠올려 보게 된다. 시인은 작품마다 고해성사 같은 시를 내놓았다. 읽다 보면 흙탕물이던 마음의 샘이 아주 느릿느릿하게 맑아진다. '生놀이'는 고통을 사랑하는 이름이라지만, 그의 시는 피곤한 우리의 발을 씻겨준다.
'지(智)·력(力)·진(進) 나아가라!'
서문에 쓰여진 이 마지막 문장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경구 같다. 무력한 일상을 질타하고 어떻게든 살아 내겠다는 의지의 포효다.
시인은 1980년 「전북문학」에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 이유'를 발표한 뒤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 이유」, 「세상엔 용서해야 할 것이 많다」, 수필집 「생놀이」,「생각한잔 드시지요」 등을 펴냈다. 시인은 또한 전북문학상, 박태진 문학상, 백양촌 문학상, 에스쁘아 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